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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항

w. 레부 (@chocowhale)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계절이다. 길거리에서 즐겁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 겨울이 찾아왔다. 많은 것이 얼어붙는 것이 당연한 계절, 이 이야기는 바다조차 얼어붙은 어느 작은 항구 마을에서 시작한다. 이 마을은 봄에서 가을까지는 작은 배가 여럿 드나드는 곳이지만 겨울에는 뱃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다. 겨울에는 항구 근처 바다가 얼어붙어 배가 도저히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겨울에 이 마을 사람들은 바쁜 항구 일을 잠시 내려놓고 다른 소일거리를 하며 그 계절을 보냈다.

 

겨울신 각별은 그 항구 마을의 거리를 느릿한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인간 청년으로 모습을 바꾼 각별은 신의 모습과는 다르게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계절에 종종 인간들의 마을로 내려와 그들의 삶을 살피는 것을 좋아했다. 눈싸움할 수 있게 눈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재잘대는 아이들의 목소리부터, 따뜻한 저녁을 준비하는 어느 가정집 부엌의 화톳불 소리까지. 각별은 자신의 계절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며 항구로 향하는 길을 걸어갔다.

 

항구에 가까워지자 각별의 눈에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희끗희끗 흰 머리가 보이는 한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항구에 서서 얼어붙은 바다 저편을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각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계절에 항구 앞바다는 전부 얼어붙기 때문에 들어올 배도 나갈 배도 없었다. 그러므로 항구에서 저렇게 무언가를 기다리며 바다 건너를 바라볼 사람은 이 계절에 없었다.

 

 

 

"바다를 보고 계십니까?"

 

 

 

흥미가 생긴 각별은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각별을 돌아보는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낯선 이를 향한 의아한 빛으로 깜빡였으나, 이내 부드러운 표정이 되어 답을 이었다.

 

 

 

"오늘 들어오기로 예정되어있는 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계절에 이 마을 항구는 얼어붙어서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오늘 출항한 배가 있었습니까?"

 

"하하, 저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 저기 북쪽 산에 있는 마을 사람입니다. 들어오기로 예정된 배는 몇 주 전 바다 건너에서 출발한 배고요. 제 마을과 가장 가까운 항구가 이곳이라 왔는데, 이렇게 바다가 얼어붙었으니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중년 남성의 말에 각별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항구 앞이 전부 얼어붙어 있어 당분간 어떤 배든지 들어오기 불가능해 보였다. 얼지 않은 먼 바다 쪽을 바라보니 희미하게 배의 형상이 수평선에 떠 있었다. 아마 남성이 기다리고 있는 배인 듯싶었다. 뒤늦게 이름을 물어보자 남성은 자신을 공룡이라고 소개하였다.

 

 

 

"배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제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족분을 기다리고 계셨군요. 그 배의 선원입니까?"

 

"하하, 아니요. 제 아들은 바다 건넛마을에 일 때문에 갔던 산골 사람입니다. 올여름이 끝날 무렵 이 항구에서 배를 타고 갔었지요."

 

"아드님을 못 본 사이에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었군요. 오랜만에 보니 기쁘시겠습니다."

 

 

 

공룡은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선착장 직원 옷을 입은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 들린 깃발을 보아하니 저 멀리 얼어붙지 않은 바다에 떠 있는 배와 깃발로 신호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 같다.

 

직원의 말을 들어보니 항구 앞바다가 얼어붙어 도저히 배가 항구에 들어올 수 없는 상태이니, 선장이 내일 아침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만약 얼음이 녹지 않으면 다른 항구로 배를 돌리겠다고 한다. 다만 직원이 설명해주길, 자신이 이 마을에서 이십 년간 선착장에서 일했는데 이 시기에 바다가 녹은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내일 아침에도 상황은 비슷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가요... 여기서 가장 가까운 다른 항구가 어디입니까?"

 

"남쪽에 바다가 얼지 않은 마을이 있긴 합니다만, 마차를 타고 보름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이 계절엔 길도 얼었고 산도 험하기에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모르고요. 바닷길로는 사흘 정도 걸릴 터라 아마 배가 입항하는 날엔 도착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만약 물건을 받으시려는 거면 항구 근처에 보관소가 있으니 그쪽으로 찾으시면 될 겁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원의 상세한 설명에 공룡이 감사를 표했다. 직원이 돌아가자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드님이 너무 오래 기다리실까 봐 걱정되십니까?"

 

"그것이...실은 마을 이웃들에게 어린 손녀딸을 맡겨두고 왔습니다."

 

 

 

손녀? 공룡의 아들에게 딸이 있었나 보다. 저 배에 타고 있을 사람은 누군가의 아들임과 동시에 누군가의 아버지였다.

 

 

 

"열 밤만 있다가 돌아오기로 아이와 약속했는데, 남쪽 마을에 갔다 오려면 한 달은 족히 넘겠군요. 너무 늦게 돌아가면 아이도 불안해할 테고 이웃분들께도 민폐일 거라 걱정입니다."

 

"많이 곤란하시겠습니다."

 

"하하, 실은 이럴 것을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 항구가 겨울에 잘 얼어붙는다는 것을 알고 왔거든요. 그래도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가 이곳이라 온 건데... 어쩔 수 없지요."

 

 

 

그는 이럴 상황에 대비해 여비도 넉넉히 챙겨왔다며 웃어 보였다. 내일 남쪽 마을로 향할 마차를 미리 구해둬야겠다며 공룡이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였다. 무언가 생각하던 각별이 그를 불러세웠다.

 

 

 

"선장님께서 내일 아침까지 배를 기다려주겠다고 하셨으니, 마차는 내일 구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지만 내일도 얼음이 녹지 않을 거라 하였는데...."

 

"하루만 기다리셨다가 내일 아침에 확인하고 마차를 구해도 늦지 않지 않습니까. 혹시 압니까? 내일 얼음이 전부 녹을지."

 

 

 

공룡은 각별의 말에 바다를 흘끗 돌아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바닷가에는 여전히 꽁꽁 얼어있는 얼음이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반사해내고 있었다. 얼음이 내일 녹을지도 모른다는 각별의 말은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신의 말이 신빙성 없어 보일 거라는 것은 각별도 알고 있었다.

 

 

 

"그럴까요, 그럼."

 

 

 

그러나 공룡은 그리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였는 지는 모른다. 어쩌면 이 겨울에 이동할 사람은 많지 않으니 내일 마차를 구하던 오늘 마차를 구하던 비슷할 거라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 만난 청년에게서 왠지 모르게 믿고 싶은 기운이 풍겨서 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공룡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곤 저의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각별은 그에게 마주 인사를 건네곤 그 역시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

 

 

 

겨울의 해는 짧다. 하늘의 빛깔이 노을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금세 어둠에 잠겼다. 가로등지기들은 마을의 가로등에 하나씩 직접 불을 켰다. 마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와 하나둘 자신들의 작은 촛불에 불을 켰다. 식탁에 모여 앉아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평온한 겨울밤을 준비했다.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끔 밝혀져 있던 촛불 불빛들은, 밤이 더 깊어짐에 따라 하나 둘 꺼졌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잘 자라며 뺨에 키스를 해주고 이불을 덮어준다. 아이들은 커다란 눈사람을 만드는 꿈을 꾸며 잠에 든다. 유난히 늦게까지 글을 쓰는 마을 작가의 창가에 켜져 있던 촛불 불빛마저 꺼지면, 모든 마을 사람들이 잠에 든 새벽이 찾아온다. 오직 하늘에 뜬 유난히 밝은 겨울별들만이 빛을 밝힌다.

 

어느 집 지붕에 앉아 그 모든 불빛들이 켜지고 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자가 있다. 불빛을 따라 났던 사람들의 생기 넘치는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던 각별은 보일 듯 말듯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온기가 담긴 소리를 좋아했다.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들의 집은 특히나 좋아했다.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와 아이를 안아주는 어른들의 소리는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기운이 느껴졌다. 편안히 잠든 숨소리를 들으면 오늘도 그들이 무사히 하루를 마치고 편히 쉰다는 것이 느껴져 자신도 편안함을 느꼈다. 계절신이 되어 좋은 점은 자신의 계절에 살아가는 자들의 삶을 이토록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별들을 확인한 각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리로 내려왔다. 아무도 없는 겨울밤거리를 낮과 똑같이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 다시 부둣가로 왔다. 얼어붙은 밤바다에선 당연하게도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하얗게 얼어붙은 얼음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낮에 만났던 공룡이 생각난다. 그에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아들과 마을에 두고 온 어린 손녀가 있었다. 바다가 얼어붙어 있어 아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다음 마을까지 갔다 오려면 한 달이 넘을 거라는 것도 생각났다. 이곳이 늘 얼음이 얼어붙어 있는 항구이기 때문에.

 

 

 

"늘 얼어붙어 있었으니, 하루 정도는 얼음이 녹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각별은 어린아이가 있는 집을 좋아했다. 아이들이 내는 웃음소리와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표정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오랜만에 집에 돌어온 아버지를 반갑게 맞이하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를,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기쁨에 찬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바닷바람과는 조금 달랐다. 한 곳을 향해 공기가 밀려오는 듯한 바람이었다. 밤의 색깔을 닮은 각별의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흩날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눈과 같이 하얀색으로 바뀌었다. 마을 사람들과 비슷했던 두꺼운 옷도 하얀 예복으로 변했다. 차가운 밤 공기에 하얗게 나오던 입김도,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 사라졌다. 바람이 멎으니, 인간의 몸을 벗고 신의 신체로 돌아온 겨울신 각별이 눈을 떴다.

 

 

 

"이렇게 힘을 쓰는 건 오랜만이네요."

 

 

 

허공에 손을 뻗자, 얼음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창이 그의 오른손에 쥐어졌다. 각별이 창을 크게 휘두르자, 창에 박힌 결정에서 빛이 나더니 작은 눈송이 같은 빛의 가루가 흩뿌려져 나갔다. 빛의 가루는 마을과 바다로 흩어지더니, 이내 그들을 두르고 있는 푸르스름한 장막의 모습을 드러냈다. 추운 계절을 만들어내는 냉기의 장막이었다. 천과 같이 겹겹이 쌓인 장막들 중, 각별은 얼어붙은 바다를 덮은 장막을 찾아냈다. 각별은 왼손을 뻗어 그 장막을 잡고는, 손에 힘을 쥐었다.

 

겨울신의 팔이 순간 크게 움직이자, 바다 위로 깔려있던 푸른 장막이 그의 손길에 걷어졌다.

 

바닷물을 한 층 떠올리듯, 하늘의 한 부분을 베어 오듯, 바다를 드리우던 거대한 장막이 신의 손에 의해 들어 올려졌다. 만약 그 행위에 소리가 붙어야 한다면, 부모가 아이의 침실 이불을 정리하는 소리와 비슷했을 것이다. 커다란 천을 걷으면서도 세심한 정성이 들어간 소리였을 것이다. 바다를 덮던 장막이 걷어지자, 차가운 기운이 한층 옅어진 것이 느껴졌다.

 

각별은 자신이 걷은 장막을 다시 마법의 실로 풀어 하늘로 올려보냈다. 바람을 따라 흩어지는 실들을 보며, 각별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수평선 저 끝과 맞닿아 있는 하늘이 밝아지고 있다. 

 

 

 

━━━━

 

 

 

공룡은 동이 틀 무렵 눈을 떴다. 그의 하루는 늘 일찍 시작하지만 오늘은 특히 더 일찍 시작했다. 역참으로 가서 남쪽 마을로 가는 마차를 구하고, 돌아가는 것이 늦어질 것 같다는 편지도 마을로 보내야 했다. 먼 길을 떠나야 하니 마을에서 추가로 구매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러고 보니 부두 근처에 아침 일찍 여는 가게가 있었던 것이 생각나 여관을 나왔다. 가로등지기들이 가로등 불을 끄는 것을 보며 공룡은 부두로 향했다.

 

 

 

"...?"

 

 

 

부두에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어제까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던 소리다. 공룡은 그 이상한 소리에 집중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소리의 정체를 깨닫고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 아니었나. 이 소리가 들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의 발은 이제 뛰기 시작했다. 호흡이 거칠어질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그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파도소리.

바다가 얼어붙은 이 계절에 절대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하아...하아..."

 

 

 

부두에 도착한 공룡은 자리에 멈춰 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숨은 차가운 겨울 공기를 맞아 하얀 입김으로 변했다. 동이 터오는 바다의 모습이 공룡의 검은 눈에 담겼다.

 

하얗게 얼어 붙어있던 바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넓고 두껍게 펼쳐져 있던 얼음 대신 생동감 넘치는 물결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수평선 위로 막 떠오른 햇빛을 받은 겨울 바다는 짙고 푸른, 그러나 투명하게도 맑은 푸른색이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수만의 빛으로 반사하는 바닷물결이 언제 얼어붙었었냐는 듯 일렁였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일정한 속도로 계속해서 들려온다.

 

 

 

"제가 말했잖습니까, 내일 아침이면 얼음이 녹을지도 모른다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휙 고개를 돌리니, 어제 만났던 얼굴이 보였다. 싱긋 미소를 지으며 각별은 공룡을 향해 걸어왔다. 공룡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밝은 탓이었을까, 햇빛을 받은 각별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순간 하얗게 보였다.

 

 

 

"하하, 정말 그렇네요."

 

 

 

공룡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파도소리 사이로 무언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공룡이 기다리고 있던 배가 항구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떠오르는 아침 해가 눈부시게 밝다.

 

 

 

━━━━

 

 

 

선착장 직원의 신호에 따라 배는 안전하게 항구에 닿았다. 직원은 자신이 일하는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며 얼음이 녹은 것에 매우 놀라워했다. 사실 배에 타고 있는 선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이는 각별밖에 없었다.

 

공룡은 항구로 내려오는 선원들을 향해 다가갔고, 각별은 그런 공룡을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았다. 이제 공룡은 그의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래 헤어져 있던 가족의 만남을 지켜보고 싶었기에 각별은 조용히 뒤에서 기다렸다. 배에서 내린 선원들 중 선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공룡을 발견하곤 인사했다.

 

 

 

"촌장님, 벌써 나와 계셨군요."

 

"나야 늘 이 시간에 움직이니. 자네들도 일찍 들어왔구먼."

 

"하하, 하긴 어르신은 늘 그러셨죠. 저희야 불침번을 서는 놈이 항상 있으니까요. 얼음이 녹은 걸 확인하고 바로 선원들 깨워서 왔습니다."

 

 

 

각별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장이란 저자는 과거 공룡 마을 사람이었던 것 같다. 바다 건넛마을로 가서 바다 생활을 한 지 한참 된 것 같았지만, 마을에 살 때의 인연을 잊지 않고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공룡은 선장과 서로 안부를 묻는 말을 몇 번 주고받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디 있나?"

 

 

 

부드러운 울림의 평온한 말투였다. 아마 아들이 어디 있는가를 묻는 말일 거라고 각별은 짐작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당사자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선장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더니 짧게 헛기침을 하였다. 그의 뒤에 선 선원들도 말없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질문에 답을 하는 이는 없고 짧은 시간 동안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공룡은 그저 지그시 웃으며 답을 기다렸다. 이내 선장이 작게 한숨을 쉬며 뒤에 선 선원에게 손짓하자, 그 선원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선장에게 건네주었다. 두 손으로 물건을 건네받은 선장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 물건을 다시 공룡에게 건넸다.

 

각별은 그 물건을 유심히 살폈다. 평범한 나무 궤짝인가 싶었는데 배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마감이 더 정교했고 크기가 작았다. 단순한 형태였으나 고급스러운 칠이 칠해져 있는 것을 보아 평범한 물건을 담는 상자는 아닌 것 같았다. 상자를 건네받은 공룡은 말 없이 그 상자를 바라만 보았다. 선장은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을 하는 듯 한참이나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드님 장례는 그쪽에서 최고급으로 치러주었습니다."

 

 

 

각별의 호박색 눈동자가 조금 크게 떠진 채로 굳었다. 그가 선장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공룡의 질문에 선원들이 답을 피하던 어색한 기류, 그리고 지금 공룡의 손에 들린 깔끔히 마감된 상자. 그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유골함. 선원이 건넨 것은, 공룡의 아들의 유해를 담고 있는 유골함이었다.

 

공룡이 기다리고 있던 그의 아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몇 달이나 보지 못한 아들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아버지에게 이 무슨 날벼락인가. 그의 집에서 아버지만을 기다리고 있을 어린 손녀에겐 뭐라고 설명해주어야 하겠는가. 오래 떨어져 있던 가족의 기쁜 상봉을 보게 될 줄 알았던 각별은 당황스러웠다. 그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급히 공룡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공룡의 눈을 본 순간, 각별은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상자를 보기 전과 똑같이 부드러운 표정, 깊은 바다처럼 파도 한 점 없이 고요한 눈동자. 그저 가만히 상자를 손으로 쓸어내리는 손짓. 많은 것을 이미 받아들이고 또 내려놓은 듯한 표정.

 

 

 

'...이미 알고 있었구나.'

 

 

 

어제부터 그가 기다린 것은 아들의 귀환이 아니라, 아들의 유골함이었다는 것을. 각별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

 

 

 

"급보요!"

 

 

 

일주일 전, 공룡의 앞으로 편지가 한 통 왔다. 붉은색 리본으로 매여 있는 편지는 급보를 뜻한다. 편지를 전하는 기수들은 제일 빠른 배와 제일 빠른 말을 이용하기에 전달 속도는 빠르지만, 일개 평민이 사용하기에는 가격이 무척이나 비쌌다. 그런 급보가 저 같은 산골 마을 촌장한테 올 일이 뭐가 있나 싶어 공룡은 의아했다. 보낸 곳이 아들이 간 바다 너머의 마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아들이 부자 친구라도 사귀었나 싶었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편지를 열어보았다.

 

처음 편지를 읽었을 땐 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번, 세 번 읽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편지에 적혀 있는 모든 글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을 열 번 반복한 후에야, 공룡은 편지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고였다고 한다. 추운 겨울을 대비해 마을 사람들에게 물건을 나눠주려고 높이 쌓아 놓은 물품 상자들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그 바람에 하필이면 그때 짐수레를 묶어두었던 말이 놀라 날뛰었다고 한다. 흥분한 말은 마을 광장을 내달렸고, 하필이면 그 앞에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어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고, 빠른 속도로 돌진해온 수레와 말에 치여 중상을 입었으며, 끝내 사망했다고 한다.

 

편지를 보낸 자는 공룡의 아들에 의해 목숨을 구한 여자아이의 아버지였다. 편지에 쓰인 그는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정중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의 부고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전하며 딸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담았고, 비싼 장례 비용도 모두 부담해주었다. 시신을 온전한 상태로 보내드리고 싶었으나 바닷길을 건너는 먼 길 중에 시신이 심하게 훼손될까 염려되어 어쩔 수 없이 화장을 치렀다고 한다. 장례 후 바로 아들의 일행과 친지를 수소문하였고, 마침 마을에 정박해 있던 한 배의 선장이 그와 아는 사이였기에 공룡에게 빠르게 소식이 닿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이 직접 찾아뵈는 것이 예의이겠으나 지금 마을에 자신이 도저히 빠질 수 없는 일이 있어, 유골을 먼저 선장의 배에 태워 보내고 자신은 후에 반드시 직접 찾아뵙겠다고 적혀 있었다. 딸을 구해줘서 감사하고 아드님의 죽음에 대해 무척 죄송하다고 적힌 글로 마무리된 편지였다.

 

 

 

'...대체....왜....'

 

 

 

공룡은 자리에 주저앉아 허망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주변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 건 자신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회의 미덕으로 통하는 정도로만 가르쳤을 뿐이다. 이렇게 자신이 찾아가지도 못할 만큼 먼, 바다 건너 마을에서, 이름도 모를 누군가를 구하다가 죽으라고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왜 너는, 생판 남을 위해서 이렇게 허망하게...

 

 

 

"우음-"

 

 

 

방 한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공룡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작은 방 안쪽에서 낮잠을 자는 그의 세 살 남짓 된 손녀의 잠꼬대였다. 햇빛이 따가운지 눈을 찌푸리며 뒤척거리던 그의 어린 손녀는 햇빛을 피해 몸을 꼼질거리더니 다시 새근새근 잠들었다. 공룡은 제 손녀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네 딸이 생각나서 못 지나쳤던 게냐?"

 

 

 

슬픔에 잠겨 울 시간조차 사치였다. 편지에 유골함을 배에 태워 보내겠다고 적힌 날짜가 벌써 몇 주 전이었다. 배로 오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빠르면 나흘 뒤에 항구에 배가 도착할 것이다. 공룡은 잠에 든 아이를 품에 안아 들고 이웃집 문을 두드렸다. 그의 마을 사람들은 전부 순박한 사람들이었기에 갑자기 찾아온 공룡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사정을 들은 이웃들은 애도를 표했다. 이웃들은 흔쾌히 그가 돌아올 때까지 잠뜰을 맡아주겠다고 하였다. 이웃의 품에 잠뜰을 안겨주려 하자, 말소리에 잠을 깼는지 아이가 눈을 뜨곤 공룡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어디 가요? 맑고 순진한 눈망울로 그렇게 물었다. 으응, 할아버지 잠깐 어디 갔다 와야 한단다. 이웃 분들이 우리 잠뜰이를 돌봐줄 거야. 옆집 아주머니 기억하지? 공룡은 손으로 저의 손녀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열 밤만 기다리고 있으면 할아버지가 돌아올게, 약속. 손녀의 작은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커다란 손가락을 걸었다. 아이는 다시 잠이 오는지 고개를 꾸벅거리며 할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아이를 받아든 이웃은 자신의 딸이 있는 방에 같이 재우겠다며 2층으로 올라갔다.

 

공룡은 자신의 손녀가 저더러 왜 가냐고 묻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을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는지 아직 자신은 알지 못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짐과 여비를 챙겼다. 아랫마을 항구로 간다는 말에 지금 이 계절이면 그 항구는 얼어붙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이웃이 설명해주었다. 여정이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다며 여비를 넉넉히 챙겨가라는 말에 공룡은 감사를 표하며, 아랫마을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눈이 쌓이기 시작하는 겨울길은 덜컹거려 마차가 지나가기 편한 길은 아니었다. 아랫마을이라 해도 가는데 나흘은 걸릴 거리라 마차도 여러 번 갈아타야 했다. 항구 마을에 간다 하니 무슨 일로 가시냐고 마부가 쾌활하게 물었다.

 

 

 

'아들의 유골함을 받으러 갑니다.'

 

 

 

차마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위로를 받는 건 이웃들로 충분했다. 처음 만나고 이후 다신 보지 않을 이들에게까지 자신의 불행을 전하고 싶진 않았다. 자신의 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할 거면서 그들이 안타까이 건넬 동정을 받고 싶지 않았다.

 

 

 

"-아들을 만나러 갑니다."

 

 

 

결국 공룡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마부들은 하나같이 기쁘시겠다며 멋진 아들을 두어 좋으시겠다고 말을 건넸다. 네, 그렇습니다. 공룡은 웃으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

 

 

 

"...아드님의 장례식은 그쪽에서 최고급으로 치러주었습니다."

 

 

 

깔끔하게 마감된 상자를 손에 받아 들었다. 가벼웠지만 분명 무게가 담겨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상자였으나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서일까, 손에 닿는 감촉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유골이구나, 공룡은 쓰게 웃었다. 이것이 내가 들고 돌아가야 할 유골이구나.

 

 

 

"...유골함을 자네 배에 싣고 와줘서 고맙네."

 

 

 

공룡은 뱃사람들의 사정을 잘 알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 날씨 속에서 작은 배 하나에 그들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뱃사람들은 여러 미신을 믿었다. 그들 중 하나가 시체와 유골을 배에 태우지 말란 것이었다. 죽은 자의 망령이 따라와 배를 가라앉힐 수도 있다는 부류의 이야기였다. 가뜩이나 시체를 운구하는 마차를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런 미신이 있기에 배를 구하는 건 더더욱 힘들었다. 같은 마을 출신인 선장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아마 아들의 유골함은 비싼 웃돈을 얹은 마차에 겨우 실려 몇 달 동안 산길을 돌고 돌아 자신에게 도착했을 것이다. 선장은 괜찮다 하더라도 같이 탄 선원들은 불안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유골함을 가지고 와준 것에 공룡은 고마웠다.

 

 

 

"불길한 걸 자네 배에 싣고 오게 해서 미안하네."

 

"불길한 것이라뇨, 그런 말 마십시오 어르신. 저는..."

 

 

 

선장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거친 바닷사람이라 그런지 말을 꺼내기 무척이나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공룡은 그런 선장을 건조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마 그가 앞으로 질리게 들을 위로 중 하나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위로는 아마도 자신에게 그리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유골함을 들고 서 있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닿을 수 있을 말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지만 공룡은 조용히 선장의 말을 기다렸다. 한참이나 말을 고르던 선장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는... 아드님처럼 훌륭한 분의 마지막 항해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유골함을 든 공룡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메말라 있던 그의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여 다른 색을 담았다.

 

무어라 답을 해야 할 지 몰랐다. 가벼운 위로나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유골함을 억지로 운반해온 자가 예의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 정도는 구분해낼 정신이 남아 있었다. 표현이 서툰 바닷사람이 한참이나 말을 고르고 골라 건넨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무어라 답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아드님과 함께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선장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공룡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의 뒤에 선 선원들도 말없이 경례하며, 그들 역시 선장과 같은 마음이었음을 표현했다. 그 배에 탄 사람들 모두가 불안함을 느낀 대신, 정중한 마음으로 상자를 싣고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룡은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잠시간 침묵하다, 그들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전부 담아내기 어려울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항해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있는 뱃사람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선원들이 전부 마을 거리로 이동하자 항구에는 각별과 공룡만 남게 되었다. 각별은 여전히 항구에 오도카니 서 있는 공룡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남아있는 둘의 머리 위로 옅은 눈발이 다시 날리기 시작했다.

 

 

 

"...들었냐, 아들아. 너와 함께 한 항해란다."

 

 

 

상자를 내려다보며 공룡이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듯 작게 중얼거렸다. 애써 미소 짓고 있는 입꼬리가 미약하게 떨린다.

 

 

 

"나는 네 유골을 받으러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저들은 내게 아들을 데려다 주러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참으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왔구나..."

 

 

 

아들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서둘러 와야겠다는 생각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항구로 오는 길엔 아들이 죽었다고 제 입 밖으로 꺼내기 싫어 제 감정을 돌아보지도 못했다. 항구가 얼어붙었다는 걸 알았을 땐 유골함을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 지 생각하느라 바빴다.

 

아들과 함께 왔다는 선장의 말을 들어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아들이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울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수고했다, 아들아. 수고 많았다...."

 

 

 

상자 뚜껑에 따뜻한 물이 떨어져 작은 물방울 자국을 새겼다. 하나였던 그 자국은 둘이 되고, 다시 셋이 되며, 이윽고 차마 다 세지 못할 만큼 많은 자국을 남겼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가 녹은 자국보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따뜻한 자국이다. 아버지는 따뜻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아들을 품에 부드러이 안았다.

 

 

 

"집에 함께 돌아가자꾸나."

 

 

 

━━━━

 

 

 

바닷물이 녹아 파도가 치는 작은 항구마을에 옅은 눈이 계속해서 내렸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보이는데도 눈이 계속 내리는 것은 이상했으나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쌓일 눈은 아니니 길이 얼지 않을 거라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이제 가시는 건가요?"

 

 

 

역참에서 마차를 기다리고 있는 공룡에게 누군가 물었다. 공룡은 각별을 돌아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과 함께할 마지막 여행입니다."

 

 

 

두 손으로 유골함을 꼭 쥔 그가 부드러이 말했다. 눈가가 붉게 부어있었으나 더이상 감정이 메마른 눈빛은 아니었다. 빛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깊어 어둡고 고요한 바다 같던 그의 눈은, 이젠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파도를 닮았다.

 

 

 

"제 아들은 이름도 모를 남을 돕다가 떠났지요. 아들의 마지막이 부끄럽지 않도록, 저도 제 아들처럼 남들을 도우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후에 다시 만난 아들에게 너는 훌륭한 일을 했다고, 이 아비는 너의 마지막이 자랑스럽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룡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아마 본래부터 선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 테니. 각별은 공룡의 손에 들린 유골함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유골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겨울 동안은 집에 두었다가, 땅이 녹으면 먼저 간 며늘아가 옆에 묻어줄 것입니다. 바로 묻어주는 게 맞겠으나, 언 땅을 파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그리고, 잠시 집에 함께 있고 싶기도 해서요."

 

 

 

공룡은 따뜻한 눈빛으로 유골함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여전히 바람에 날리며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 한동안 함을 바라보던 공룡이, 나지막이 운을 띄웠다.

 

 

 

"저는 마을 촌장입니다. 작은 마을이어도 사람들이 저를 믿고 의지하고 있지요. 그러니 저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너무 깊게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당장 저만 바라보는 손녀딸도 있고, 또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 나아가야 하니까요. 그러니 저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울지 못할 것입니다."

 

 

 

공룡은 고개를 들어 항구 쪽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흔들며 아름답게 내리는 눈발 사이로,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바다가 보였다. 하늘과 맞닿은 푸른 수평선이 공룡의 눈에 담긴다.

 

 

 

"그러니...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 울고 싶어지면, 이 항구로 오려고 합니다. 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곳에 내려서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울 것입니다. 아들이 웃으며 떠나던 그 바다와, 그리고 아들이 다시 돌아온 바다를 바라보며, 푸르게 파도치는 바다 위를 항해한 내 아들의 모습을 기억할 것입니다."

 

 

 

수평선을 바라보는 공룡의 눈이 바닷물의 파도처럼 넘실대며 일렁인다. 그는 아마 이곳에서 앞으로 많은 눈물을 쏟을 것이다. 마을에서 울지 못하는 촌장은 이곳에서 와 비로소 아버지가 되어, 그의 아들이 떠나고 또 돌아왔던 항구에 서서 그를 추억할 것이다.

 

겨울 바람이 공룡과 각별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간다. 공룡을 바라보는 각별은 말이 없다. 눈으로 그저 공룡을 좇을 뿐이었다. 바람이 잦아들길 기다리며 바다를 바라보던 공룡은, 이내 멋쩍게 웃으며 각별을 돌아보았다.

 

 

 

"하하, 겨울엔 오기 힘들겠군요. 이 항구는 겨울에 얼어붙는 날이 대부분이니까, 제 아들이 돌아왔던 파도를 보지 못할 테니까요."

 

"겨울에 오셔도 됩니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각별이 입을 열었다. 단호한 말투였다. 앞으로의 일을 아는 듯, 혹은 앞으로 할 일을 결정했다는 듯.

 

 

 

"앞으로 이 항구는 얼지 않을 테니까요."

 

 

 

공룡은 고개를 돌려 각별을 바라보았다. 단단한 빛을 띤 호박색 눈동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은 터무니없었으나 공룡은 웃음을 터뜨리는 대신 작게 미소만 머금었다.

 

 

 

"각별 씨가 하는 말은 이상하게 진짜일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각별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공룡은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듯 웃었다. 상대에 대해 예상 가는 것은 있었으나 굳이 확답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마차가 도착하자 공룡은 각별에게 인사를 하곤 마차에 올랐다. 가벼운 말발굽 소리가 길을 따라 났다. 소리와 함께 점점 작아지는 마차를 각별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시야에서 마차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각별은 발걸음을 옮겼다. 눈발이 살짝 거세지는가 싶더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부드럽게 눈이 내렸다. 누군가가 서 있던 자리엔 그의 그림자 대신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가 자리를 채웠다.

 

 

 

그날 이후로, 그 항구의 바닷물은 얼지 않았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 찾아와도, 이상하게 그 항구만큼은 얼지 않았다. 늘 얼어붙던 항구라 마을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겨울신의 축복이라는 소문이 잠시간 떠돌았으나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곧 잊혀졌다.

 

그렇게 누구도 그 이유는 모른 채, 그 항구는 부동항이 되었다. 얼음이 얼지 않는 그 항구에서는 언제나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아들이 돌아온 그날처럼, 넘치는 푸른 빛과 넘실대는 바다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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