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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법

w. 물결 (@flowing_99)

  잠뜰은 유독 바다를 좋아했다. 어렸을 때는 인어 공주 이야기를 사랑했고, 다 큰 후에는 선원을 동경했다. 있지, 라더야! 구름이 없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 밤이면 잠뜰은 종종 라더를 이끌고 해변가로 나갔다. 밀려오는 파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맨발로 찰박거리다 보면 라더 역시 저도 모르게 잠뜰을 따라 웃고 있었다. 오직 바다와 함께할 때만 그리 해맑게 미소짓던 동네 누나를 라더는 종종 빤히 바라보았다. 저렇게나 좋은가.

 

  너도 곧 너의 바다를 찾을 거야. 언젠가 잠뜰은 라더에게 그리 말했다. 빨간 머리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으며. 다만 그 말은 고작 열 살이던 라더가 이해하기엔 너무도 어려웠어서, 그냥 그렇구나 넘길 뿐이었다. 또래 아이를 찾기 힘든 조그마한 시골 동네에서 나고 자란 라더에게 잠뜰은 세상 전부였다. 고로 잠뜰이 도심으로 떠나던 날 울며불며 붙잡는 건 당연했다.

 

  —이거 놔 줘. 나 가야 해.

  —가지 마. 누나 없으면 난 혼자 심심해서 어떡해.

  —가끔 놀러올게.

  —가끔 말고 자주.

  —……미안.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라더는 포기하곤 뒤돌아섰다. 속상하고 또 미안한 마음에 잠뜰은 터덜터덜 걸어가는 어린아이를 한참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갈색 머리칼 사이사이로 바다 내음이 흘러들었다. 이젠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소금기 가득한 바람은 더 이상 만나기 어렵겠지. 아쉬운 듯 바닥을 한참 응시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끝내 길을 떠났다.

 

  더 넓은 바다로 나가기 위해 바다를 등진다. 너무도 모순적이지만 잠뜰은 그것을 행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태어난 사람인 양 끝도 없이 그곳을 그리워하며, 발걸음을 하나씩 떼었다. 수평선 위로 드리워진 노을이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미련 가득한 검은빛 잔해가 질척거리며 움직였다. 곧이어 황혼이 깔리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서둘러 가지 않으면 예약한 기차에 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잠뜰은 금세 잡념을 지워내고 달렸다. 꼭, 다시 올 거야. 반드시.

 

  십수 년이 지나고 잠뜰이 떠난 날짜는 어김없이 올해에도 돌아왔다. 라더는 저도 모르는 새 해안가에 다다라 있었다. 파도에 닿을락 말락 하는 위태로운 자리에 쪼그려 앉아 손을 뻗었다. 누나는 여기가 뭐가 그렇게나 좋았어? 나에게 대체 뭘 가르쳐주고 싶었던 거였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잔물결이 반짝였다. 그게 너무도 눈부신 듯 한껏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라더는 한참 그 자리를 지켰다. 추운 겨울 바닷바람 맞으며 다리가 저려도 계속.

 

  겨울에는 해가 짧았고 밤이 금방 찾아왔다. 문득 라더는 제가 바라보는 수면에 너무도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이 빼곡히 비친다는 걸 알아챘다. 고개를 들자 은하수가 펼쳐졌다. 아 — 라더는 탄성을 내질렀다. 예쁘다, 진짜. 벌어진 입을 닫을 생각도 못한 채 그 풍경에서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매년 같은 날 같은 자리에 나왔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몰랐을까.

 

  어쩌면 누나는 바다가 아니라 우주를 동경한 걸지도 몰라. 그래서 나랑 해변에 나올 때도 늘 밤이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누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나는 바다보다도 넓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저 우주를 사랑했을지도 몰라……. 누나는 저 우주가 너무 좋아서, 그래서 바다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걸 수도 있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왜냐면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 꽤나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누나.

 

  라더는 알았다. 부모님과 싸우고 뛰쳐나와 모래사장을 거닐다 우연히 라더와 마주친 날, 잠뜰의 웃음소리엔 물기가 어려 있었고 눈 밑이 붉어진 채였다는 걸.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가야 하니 잡지 말라며 단호히 말하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단 걸. 달려가던 그 뒷모습은 결의에 찬 듯 보이면서도 어쩐지 제 눈에 너무 초라하고 위태하게 비쳤다는 걸.

 

  라더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누나와 반대로 우주를 그리는 척 바다에 몸을 맡긴다면, 언젠가 흘러가다 누나를 만날 수 있을까. 역설적인 사람에게 닿기 위해선 내가 그 사람을 닮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그 정도 희생은 내가 기꺼이 할게. 그러니 더 이상 내게서 도망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잠뜰은 역시 참 매정한 사람이었다. 가끔 놀러오겠다고 해 놓고서 그 이후 단 한 번도 이 동네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동네에는 종종 이사 들어오는 집이 있었고 라더는 그 중 저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십이 월 말이 되면, 잠뜰의 생일 혹은 잠뜰이 떠나간 날이 가까워 오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공허한 기분을 견뎌 내기 어려웠다. 머리를 싸매고 며칠 끙끙대다 바다를 보러 나오면 그제야 숨이 트였다.

 

  원하는 게 있다면 쟁취해야지. 꾸욱 눌러 쥔 주먹에 땀이 배어 나왔다. 반드시 만나러 갈 거야. 누나가 나를 기억 못 하리라 생각하지 않아. 일부러 안 오는 걸 거야. 아직 때가 아니라 생각해서. 나라도 그럴 거야……. 잿빛 하늘 아래 잿빛 건물들이 들어찬 가운데 살다가 여기로 돌아오면 두 번 다시 그곳으로 갈 수 없을 테니까. 이해하려 노력해 볼게, 응.

 

  라더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우뚝 멈춰 서선 다시 바다를 향해 몸을 돌리고 실눈을 뜬 채 위를 쳐다보았다. 너도 곧 너의 바다를 찾을 거야. 그 말이 귓가에서 윙윙 울렸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곧, 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나도 찾았어.

 

  누나.

  내 바다는 여기 있었어.

 

  나는 우주가 좋아.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저 검은 공간이 좋고 그 속에 끝없이 펼쳐진 별이 좋고 그게 비치는 지구의 바다가 좋아. 누나가 신비한 심해에 닿고 싶어했듯이 나도 저 우주의 가장자리가 궁금해. 이제 나 역시 누나처럼 여길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할 때가 온 걸 거야. 겁이 나고 무서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돌아서던 누나의 눈빛도 돌이켜 보면 분명 그리 말하고 있었어.

 

  그렇지만 괜찮아. 아주 오랜 옛날 누군가는 반드시 걸어갔을 길이거든. 그게 달에 첫 발을 디딘 사람이든 우주선을 타고 허공을 표류하던 사람이든 간에 상관없어. 그 사람은 거리낌 없이 이 길을 가기로 선택했을 거고 내가 그 뒤를 따르는 이유는 이걸로 충분해. 겁나는 건 여전히 마찬가지지만 괜찮아, 정말로. 할 수 있다는 걸 알아. 누나도 해내고 있을 거고.

 

  먼 훗날 찾아갈게. 그땐 바닷속에 살아가는 별들 혹은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 대해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자. 눈물 흘리기도 하고 깔깔대며 웃기도 하면서. 여전히 눈 밑은 거뭇하고 피곤한 날이 너무 많겠지만 또 위태롭겠지만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누나에게도 나에게도 각자의 바다가 있으니까. 언제든 몸을 내어 놓고 편히 둥둥 떠다닐 수 있는 아름다운 파도를 기어코 찾아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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