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을 집어삼키는
w. 새우 (@saywoo_o)
“저 깊은 심해 속에는 모두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있단다.”
아무것도 없는 고요함이, 그렇기에 더욱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나의 뇌리를 강타했다.
“하, 유토피아는 무슨”
갑자기 극심한 두통이 몰려온 나는 웃으며 작게 읊조렸다. 모두가 꿈꾸는 이상이 일관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가볍게 무시하고 디스토피아같은 일상을 살아갈 준비를 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나만 들은것이 아니었는지, 대피소의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밖으로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쳐다본 잠뜰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생기가 사라진 초점없는 눈을 하고 정말.. 좀비처럼, 마치 좀비처럼 어딘가로 몰려가고있었다.
나와 같은 사람은 혼자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정확히 한 사람만이 정상인 듯 보였다. 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의 눈동자에 안도와 놀람, 그리고 동질감이 서렸다.
“안녕하세요! 일단 우리 통성명은 가면서 할까요?”
낯선 이가 작은 송곳니를 빛내며 밝게 인사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수많은 인파들을 따라 낯선 이와 함께 뛰었다.
“그래서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전 잠뜰이라고 해요. 당신은요?”
“전 이 시대 최고의 미남, 공룡이라고 합니다.”
공룡이 짙은 갈색의 짧은 머리를 휘날리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이 멎더니 처음으로 정색했다.
‘내가 이사람을 얼마나 오래 봤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
공룡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 짧은 한마디가 이 상황의 끔찍함을 더욱 잘 나타내주었다. 우리가 있던 대피소 뿐만 아니라 다른 대피소에서 온 인파까지 수백명이 항구로 몰려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바다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이 미친 사람들…”
아니, 애초에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난 순간 속이 뒤틀리는 듯 했다. 잠시 뒤, 그 둘은 저 미친 ..생명체들의 특징을 깨달았다.
첫 번째, 그들은 무채색이다.
두 번째, 그들은 바다를 보면 황홀한 웃음을 짓는다. (이는 사진이나 영상 등 실물이 아닌 것에도 반응한다.)
세 번째, 그들은 불을 무서워한다. (이는 두 번째와 동일한 조건을 가졌다.)
대피소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기록하려는 순간,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채색들 속에 채도높은 노란색과 보라색을 본 것만 같았다.
“잠시만요 공룡 씨! 저기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그들을 향해 달렸다.
“잠시만요!!”
공룡은 의문을 모른 채 나를 따라 달렸다.
“오, 달리기 빠른데?”
피곤해 보이는 검은 장발의 노란 옷 남자가 우리에게 박수를 쳤다. 그 옆에는 보라색 옷을 입은 토끼 귀를 단 남자가 서 있었다.
“저는 수현, 제 옆에는 각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신가요?”
“저는 잠뜰이라고 하고, 제 옆은..” “전 이 시대 최고의 미남 공룡이죠!”
“..네, 뭐 그렇습니다.”
“혹시 대피소에서 생활 중이면 저희 아지트로 오시는 건 어떠세요?”
수현이 말했다. 우리는 열악한 대피소에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들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아지트에 들어온 우리는 그 안에서 쉬고있던 두 사람을 만났다. 한 명은 밝고 연한 갈색 머리를 가진 덕개, 나머지 한 명은 새빨간 머리를 가진 라더였다. 나는 자신이 생각한 가설이 맞았음을 깨닫고 속으로 내심 만족했다.
‘우리만 그 목소리에 현혹되지 않은 것은 모두 이유가 있을거야. 우리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우리’라는 단어가 입에 붙은 채로. 그리고 그들은 라디오를 들어보기로 하였다.
“현재 정…부는 색을 빼앗기..않은 ...분들…찾고 있..니다.. 이에 해당..는 분들… ……..로 오시…”
같은 내용의 녹음이 계속 재생되고 있는 것 같았다.
“에휴, 이 망할 라디오. 형, 아직도 안 고쳤어요?”
공룡이 말했지만 각별은 가볍게 무시했다. 각별이 눈을 번뜩이고는 라디오를 수 초 응시하니 곧 정상적으로 방송이 나왔다.
“현재 정부는 색을 빼앗기지 않은 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분들은 가능한 빠르게 재난대처본부로 오시길 바랍니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이 커진 채로 각별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보기만 했는데 물건이 고쳐지지?’
그러자 수현이 아차싶은 듯 설명해주었다.
“색을 잃지 않은 우리는 모두 오드 아이와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았어요. 이 능력이 발현되는 것을 저희끼리 각성이라 부르기로 했어요. 지금은 각별 형, 저, 라더, 그리고 덕개 모두 능력이 있어요. 두 분은 능력이 발현되셨나요?”
난 아니라고 했지만 공룡은 그렇다 답했다.
“저는 다른사람의 지식을 가져올 수 있어요.”
수현이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각별 형은 방금 보신 것처럼 사물을, 저는 사람의 정신력을 컨트롤 할 수 있어요. 라더는 불을 컨트롤할 수 있고, 덕개는..저희와 다른 세계와 소통할 수 있어요.”
우리가 의아해하자 수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더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덕개는..과거나 미래의 누군가와 대화를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수현의 설명 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공식적으로 ‘컬러오너’라고 부른다.) 재난대처본부로 갈 채비를 하고 출발했다. 차 안에서 우린 웃고 떠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교대로 잿빛 사람들을 경계하기를 반복했다. (이 이후에는 필체가 달라졌다. 일행 중 다른 사람이 적은걸까?)
피곤했기 때문에 몇몇은 졸기 시작했다. 잠뜰과 덕개가 졸고있을 때, 나머지 사람들이 잠뜰을 급히 깨웠다. 제 온 몸을 시원하고 습한 무언가가 휘감고 있었으므로—잠뜰은 비몽사몽한 상태로 있을 겨를조차 없어보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무언가는 물이었고 그것이 제 능력이라는 것 또한 알아차렸다. 당황한 잠뜰은 물을 컨트롤할 수 없었고 여섯 명 모두가 쫄딱 젖고 나서야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라더가 나머지를 말려주었고 정차한 김에 서로의 능력들을 직접 보고 각자 연습을 시작했다. 불을 무서워하는 특성덕분에 그들 주변에 잿빛이라고는 보기 힘든 정도였기 때문에 마음놓고 능력을 사용했다. 수현과 덕개는 차 안에서 쉬었고 각별은 주변에 나뒹구는 기계들이나 조명 등을 고쳤다. 잠뜰은 라더의 도움을 받아 어느 정도 능력을 수월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라더만 다섯 번 이상 몸이 젖었다가 말랐다를 반복했지만)
그들은 잠시의 재정비 후 다시 재난대처본부로 출발했다. 몇 시간 후 다시 맡아보는 바깥공기는 썩은내가 풍겨왔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으니 만족했다. 다같이 건물을 올려다보며 끝이 없다고 밝게 웃었다. 오늘만큼은 정말 즐거웠다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백화점에 온 듯 깔끔하고 상쾌한 향기가 났다.
“저희는 컬러 오너입니다. 어디로 가야하나요?”
바로 앞에 위치한 안내데스크 직원분에게 그들은 조심스레 물었다.그제야 직원은 건물의 가장 안쪽 ‘관계자 출입금지’ 엘레베이터를 향해 손짓했다. 엘레베이터에 타기 전, 덕개의 한 쪽 눈이 번뜩였다.
“잠시만요, 준비할까요?”
덕개의 한마디에 모두가 한 쪽 눈을 번뜩였다. (여기부터 필체가 다시 돌아왔다. 왜일까?)
역시, 엘레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공격이 시작되었다. 전투 쪽에 특화된 나와 라더가 전방에 있었고, 수현과 공룡이 뒤에서 지시했다. 우리는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었지만, 대비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들은…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전투가 끝나자, 길게 펼쳐진 흰 복도에서 누군가 느긋하게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재난대처본부 총책임자입니다. 컬러오너 여러분들을 일곱 분이나 만나뵙게 되어 기쁘네요. 아까의 일은 간단한 시험에 불과하였을 뿐이니 가볍게 넘어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 쪽으로 더 들어가서 이야기 나눠볼까요?”
간단한 시험이라니, 더욱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잠시만 일곱 명이라고?
………역시 의심은 그저 불필요한 생각이 아니었다.
뒤쪽에서 특이한 약품의 냄새가 코를 찌르더니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우리의 몸이 무기력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점점 눈이 감겨오기 시작했고..우리의 정신이 아득해져왔…(이 이후부터는 글씨가 흘러내려 읽기 힘들다.)
“이게 초능력 연구..소의 가장 첫 번째 기록이구나…”
토끼귀를 가진 흰 실험용 가운의 청년이 이를 갈며 먼지가 눈처럼 소복이 쌓인 파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젠장할 연구소의 소속 연구원이었던 수현은 연구소의 탈을 쓴 끔찍한 곳에 이용된 실험체 알파이자 IPS 국장 각별을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