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바다
w. 우람 (@Uram_0510)
여름 날 해가 질 무렵, 한 없이 광활하고 차가운 바다를 목도하고 울음을 터뜨렸을 때. 날 달래던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보인 공허한 눈을 나는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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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바다를 보고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내 작은 몸집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커서,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집어 삼킬 것 같이 위협해오는 파도가 너무 버거웠기 때문이었을까, 서럽게도 울었던 기억.
그 기억 뒤에는 아직까지도 뇌리에 깊게 박혀 있는 한 아이가 서있다.
그 아이는 내게 눈 앞에 있는 자연의 공포보다도 더 큰 충격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바닷가에 홀로 서있던 그 아이는 분명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바다를 향한 눈빛은 달랐다. 아이의 눈은 동요 없이 어둡고 공허했다. 그 눈이 담고 있는 바다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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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님, 수고하셨어요."
회사에서 자리를 정리하고 발을 떼자 같은 팀 동료들이 하나둘 인삿말을 건넸다. 형식적인 인사들에 이젠 경련이 일 것 같은 입꼬리를 작게 올려 답했다.
오늘 나는 퇴사했다.
단순하게 기쁘면서도 앞으로의 거뭇거뭇한 미래를 상상하면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입이 썼다.
나는 축 처지는 생각을 잊기 위해 이어폰에 멈춰져 있던 노래를 재생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가사들에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더욱 우울해질 뿐이었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드라이브라도 다녀올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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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탁 트인 고속도로라도 달리자 드디어 폐 속 끝까지 공기가 들어차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그 혼잣말에 답이라도 하듯 머릿속에 한 장소가 떠올랐다. 바다, 어렸을 때 그렇게 무서워하던 바다가 떠올랐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때 그 바닷가를 향해 달렸다.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엑셀을 밟을 뿐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돌아올 때면 어둑해져 있을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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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도착했을 땐 구름이 수상하리만치 많이 하늘에 펼쳐져 있었다. 그 덕에 여름임에도 시원했지만, 침침한 바다의 풍경은 그리 기분 좋지 않았다. 나는 바닷가를 천천히 걸었다.
계속 해서 걷고, 걷다가 풀썩 주저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멍하게 고개를 들었다. 구름의 색이 비구름처럼 어두운 색이 되어있었다. 그 아래 바다도... 짙어지고 짙어져 이제는 잉크를 들이부운 것처럼 검은 물들이 출렁이는 것만 같았다. 파도가 치는 소리가 천둥소리 닮게 들렸다.
그때처럼 크게 소리 내 울 것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세상을 당장이라도 덮치고 쓸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대신 묘한 공포감 또는 우울, 불안 같은 감정이 덮쳐왔다. 곧 의식이 끊어질 듯한, 뇌수가 검게 썩어가는 느낌. 내 세상의 캔버스가 검은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온통 흑백인 세상에서 시간의 흐름이 사라진 공간.
그게 진정 내가 바다에서 경험한 일이었다.
시야에 한 갈색 머리의 사람이 들어차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런 공간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 사람은 내 앞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소개하고는, 같이 일하지 않겠냐고 권했다.
거절하려 했지만 눈을 마주 본 순간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에 빛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치 앞도 안 보이게 어두워질 바닷가에서 홀로 빛나는 눈은 힘이 있었다. 분명 그건 눈물로 빚은 구슬이 내는 빛이었다. 단단한 빛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그 권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까지 따지기엔 지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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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에 걸쳐 그린 그림들이 예선에서 3번째로 떨어졌을 때도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점점 망가지기 시작할 때서야 그녀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녀가 망가지기 시작한 시점은 예선에 4번 째로 떨어진 때도,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아닌, 강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그녀는 장례식을 치르고도 세달이 지나서야, 집 밖으로 나왔고 나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바다 앞에서 그녀를 마주봤을 때,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공허한 눈으로 바다를 응시하던 아이, 그럼에도 눈 하나 꼼짝 안 하던 아이였다. 지금 그녀의 눈은 그때와 똑같았다, 눈에 비친 바다가 내려앉은 것까지도.
그녀는 그 눈으로 강아지가 마지막 가족이었다고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은 더욱 내려앉았지만, 그 눈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은 나는 희망을 느꼈다.
이제 내 눈은 빛나고 있을 것이다. 갈 곳을 잃은 내게 이 길을 권해준 그 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