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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너머 청춘의 끝자락에서

w. 유론 (@D_YR0621)

추억을 가득 품은 경험을 했던 날로부터 몇 번의 계절을 거치며, 잠뜰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렇게 당연히 다가온 청춘의 시작이자 끝자락, 스물이었다. 한때 꿈보다 현실감 없는 여행했다. 때는 17살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추억은, 그녀를 변화시켰다. 대학이라는 거대한 무게를, 그 족쇄를 잠시 풀어내며 그녀는 더 넓은 세상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그 행동은 현실에 대한 외면도, 부모에 대한 도피도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자신의 꿈과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두 번째 여행이었다. 그녀의 삶은 온전히 그녀, 잠뜰의 삶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은 여행이라는 바닷속에 녹아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재회했다.

 

 

*

 

 

화창한 날씨와 따뜻한 공기가 피부를 간질인다. 눈앞의 거대한 시계탑을 바라보곤 슬슬 시간이 되었다며 무언가를 기다렸다. 시계탑 내부에서 작동하는 시계탑 인형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홀로 그 시간을 기다렸기에, 자신의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흐릿하게나마 제대로 들려왔을 것이다. 낮지만 특유의 능청스러운 음성. 몇 년의 공백에서 들춰지는 그때의 기억.

 

 

“자, 세계 여행 동호회 회원 여러분~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연달아 들려오는 각기 다른 두 남성의 목소리까지. 타지에서 느껴진 그 익숙함에 고개를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돌리는 것은 본능적이었고, 그 목소리의 주인과 눈이 마주치기까지는 실제로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주 보는 고동빛 눈과 잿빛 눈, 두 시선이 서로를 마주 본다. 그 눈에는 각기 다른 여러 감정이 얽매여진다.

 

옆에서 익숙한 부드러운 음성이 고동빛 눈을 향해 타박하며 그 시선을 향해 옮긴다. 시선의 끝자락에 닿자, 감긴 눈의 속눈썹이 당황을 표하듯 미세하게 떨려오며 작고도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옆의 푸르른 바다를 담은 듯한 남자도 당황한 기색을 낸다. 동시에 우연인 듯 운명인 듯, 시계탑 인형이 움직이며 시계탑 내부에서 들려오는 음색이 잔잔하게 거리를 감싼다. 운명인지 우연인지 그 분위기에 어우러지는 듯이. 우리의 재회였다.

 

 

*

 

 

“그러니까, 그동안 왜 연락 하나 없었냐는 말이에요! 라더 너도!”

 

 

그녀의 서운함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가 그들을 향해 날카롭게 박혀온다. 고동빛 눈을 내리깔던 남자는 고개를 슬쩍 들며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화내는 잠뜰에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불만 섞인 변명을 중얼거렸다. 그런 그 옆에서 지긋 눈을 감을 채 그녀를 주시하던 덕개는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화 안 났으면서 화난 척은… 그래도, 역시 서운할 테니까.’

 

 

짐짓 1년이었다. 그들의 공백은. 그들이 연락하지 않은 것도. 덕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죽어가는 양심을 달랬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의 죄책감을 달래기 바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과거, 그들과 이별하던 때. 그녀와 가장 가까운 것은 한 학년 선배였던 공룡도, 덕개도 아닌 같은 학년의 같은 반이었던 라더였다. 그리고 이 셋 중 가장 아무말도 못하는 것도 라더였고, 이는 당연할지도 몰랐다. 침묵하던 그는 그저 잠뜰의 잿빛 눈을 힐끗 피하며 검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물론 이 분위기는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잠뜰이 옅은 웃음을 터뜨리며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사장의 글씨처럼 종결되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까 좋네요, 싱긋 청량한 미소를 지었다. 자유로운, 어딘가 얽매이지 않은 그 미소는 눈부셨다. 그 웃음에 긴장을 가장 먼저 푼 것은 다름 아닌 라더였고, 공룡 또한 장난스러운 웃음을 내지으며 긍정을 답했다. 물론 잠 뜰의 행동을 예측하던 덕개는 흐뭇하게 셋을 시야에 담을 뿐이었다. 이어 그렇게 그들은 서로 어떻게 지냈는가에 대해 말했다. 그들과 학교에서 이별하고 꿈에서 깬 것처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 후의 일을 말이다.

 

대략 3년, 그건 공백과도 같은 긴 시간 동안 세상에 공개되지 못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가리고 있던 것은 IPS라는 하얀 천이었다. IPS는 연구소의 사건이 모두 정리되기 전까지 안전 가옥에서 그들을 보호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그사이 당연하게도 그 셋은 가만히 있지 않았지만, 결론적으로는 큰 사고 없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렇게 고등학생의 청춘을 보낼 시기에 몇 년 동안 사회의 앞면과 뒷면, 그 경계선에 서 있던 셋은 다 함께 한 발짝 내디디며 사회라는 자유로 내보내졌다.

 

나란히 한 발짝을 내디디며 다시 맞이한 자유. 성인이 된 그들이 맞이하게 된 사회는 고등학생의 청춘을 보내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초능력에 대한 비현실적인 문제가 아닌, 앞으로의 미래라는 것에 무엇을 쌓아 올릴지. 그런 고민이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답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가장 행복한 기억의 과거를 되짚어가고, 그 셋은 똑같은 지점에서 멈췄다. 가장 행복했고, 가장 깊은 추억이 있는, 세계여행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세계여행 동호회를 만들었다 이거지!”

 

 

지금까지의 회상, 공룡은 목소리를 높이며 뿌듯하다는 듯 말했다. 그 옆에서 덕개가 불만을 중얼거리며 공룡을 한대 퍽, 가볍게 친 것은 덤이었다. 둘의 익숙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투덕거림을 잿빛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고등학교 1학년, 얇게 덮어두던 그때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꺼내온다. 한여름의 체육관, 에어컨을 온종일 틀어둔 그 잔향이 가득 들어찬 그 공기 속에서 깨지 않을 꿈과도 같은 그날의 기억을. 하지만 절대 꿈이 아닌 현실의 경험이었던 그날의 기억을 되새긴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랑 꼭 다시 만나자.’

 

 

누군가가 나긋한 목소리로, 미래를 기약했다. 그때 자신은 어떻게 대답했는가?

 

자신은,

 

뭐라고 대답을.

 

 

“잠뜰아?”

 

 

깊게 빠져있던 생각에서 현실로 꺼내준 것은 라더였다. 의아한 표정을 띄운 채 자신을 응시하는 바다의 심해를 닮은 푸른 눈이 마주친다. 자신이 방금 했던 생각은 아무래도 낯 뜨거운 과거의 공상이었기에, 곤란하다는 웃음을 내지으며 흘려보내는 게 최선의 정답이었다. 그런 그녀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라더는 잠뜰을 잠시 쳐다보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아, 짧은소리를 내뱉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공룡 형이 말한 대로 지냈는데…. 너는 어떻게 지냈어?”

 

 

자신의 근황을 물어보는 질문. 당연한 수순이었다. 잠뜰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거였다. 잠깐의 망설임, 그렇게 긴 시간을 지나지 않아 잠뜰은 아까보다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둘의 대화를 언제 듣기 시작했는지 공룡과 덕개의 티격태격 가벼운 말다툼도 어느새 잦아들고 있었다.

 

 

“음. 저는, 아무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걸 보아 어느 정도 감이 오실 거예요. 생각을 읽는 덕개 선배는 더 잘 알 것 같고요.”

 

“내가 예의 없이 남의 생각을 막 읽진 않거든!?”

 

“흐음, 그럼 안 읽었어요?”

 

“그건, 아니지만….”

 

 

덕개의 곤란한 듯한 목소리에 장난스럽게 낮은 웃음을 내며 잠뜰은 말을 이었다. 시작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전개였다. 잠뜰은 그들이 사라지고부터 2년, 그 시간 동안 아버지를 설득했고 그 설득에 성공해 결국 자신을 직접 찾을 기회를 제힘으로 얻어냈다. 자신의 꿈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자신을 위한 그 여행의 기록을 행복하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고등학생 1학년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어리고 미숙했던 시절. 그때의 자신을 도와주던 장소를 이동하던 능력도, 간단하게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주던 통역의 능력도 없어진 자신이었기에 모든 걸 혼자만의 힘으로 해냈다. 그랬기에 과거의 여행보다 힘들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큰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던 능력을 갖췄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녀의 추억에 잠긴 듯한 눈빛에 공룡과 덕개는 그동안 잘해왔다며 그녀를 향해 장난스러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걸 다 받아줄 그녀의 성격이 아니었기에 둘은 등을 퍽 소리가 몸에 울릴 정도로 맞았지만 말이다. 그걸 바라보던 라더는 푸핫, 웃음을 내지었다. 한결 공기가 가벼워진 분위기, 잠뜰은 편안해진 심리에서 문득 드러난 의문을 물었다. 여기에 없는 추억의 인물을.

 

 

“그러고 보니, 수현 선생님은?”

 

“수현 쌤? 쌤은 국장님이랑 함께 초능력자들의 복지를 맡고 있어. 우리와 연관된 일은 해결됐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외에도 어디서 어떤 비윤리적인 사고가 돌연 일어날 수도 있고? 그에 관한 지식이 선생님에게 적진 않을 테니까.”

 

 

라더의 대답에 그렇구나, 짧은 공감의 대답했다. 후로는 어떻게 말이 흘러갔는지 기억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이 순간이 꽤 즐거웠다는 것이었다.

 

 

*

 

 

잠뜰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체코의 시계탑에서 잠시 쉬어가던 그 여행은 잠시 멈춰져 있던 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듯 흘러갔다. 그래도 그 전과 다른 점이라면, 혼자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세계여행 동호회, 자신이 앞으로 이어갈 새로운 여행의 길잡이였다.

 

동호회의 일정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저녁이었다. 넷이서 모여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에 와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던 때였다. 그때 말을 꺼낸 것은 공룡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후에 잠뜰 생일이었지?”

 

“아,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본인 생일도 안 챙기고 말이야! 그래서 이 선배님이 생각해봤다는 말씀!”

 

 

공룡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얄미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 동호회가 아닌, 우리들끼리 함께 놀자는 말이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로 갈 것이냐며 물었다. 그 물음에 공룡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해운대!”

 

“엑, 세계여행하는데 갑자기 웬 부산이에요?”

 

“감성 있잖아~ 우리의 첫 만남을 이어주었던 본토 대한민국!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외에도 그럴듯한 본인만의 심취한 의견을 내뱉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잠뜰은 질린다는 눈빛으로 본인만의 감성에 심취한 그를 흘겨보다 다른 이들을 힐끗 바라봤다. 그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개요 정도는 알고 있었던 듯했다. 덕개가 잠뜰을 바라보며 그의 말에 덧붙이듯 말했다.

 

 

“뭐, 공룡의 의견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바다도 오랜만이고, 우리의 추억이 시작된 곳이니까 의미 있지 않을까?”

 

 

그의 말이 끝나자 주문한 음식이 세팅되기 시작했다. 맛있는 향기가 가득 풍기는 테이블,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제안은 긍정의 대답을 끌어내기 좋았다. 그들의 의견에 설득된 듯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는 잠뜰은 라더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듯 라더가 고개를 돌려 잠뜰을 바라보았다.

 

 

“라더 너는 어때?”

 

“좋다고 생각해. 1년에 단 한 번뿐인 생일이니까. 넌 어때? 아무래도 생일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니까 말이야.”

 

 

던지듯 말하며 덕개와 함께 테이블 세팅을 도와주던 라더가 말했다. 세 명의 말에 설득된 듯 그럴까, 라고 가볍게 중얼거리듯 말하며 잠뜰은 음식을 입에 넣었다. 입에서 피어나는 음식의 맛이 좋았기 때문일까,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네 명의 여행에 조금은 기대가 부풀어 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그렇게 생일 전날, 12월 27일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치는 탓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일행이었던 셋은 공룡의 능력으로 나라 곳곳을 돌아다녀 비행기를 타기 애매했기에 먼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비행기에서 장시간 시간을 보내고 내려와 발을 내딛는 잠뜰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으로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인영. 반가움에 자각하지 못한 미소를 띠며 다가갔다. 다만, 다가갈수록 점차 주변의 온도를 닮아가듯 차가워졌다는 문제였지만 말이다. 공룡의 손에 들린, 잿빛의 눈에 비춰진 현수막이 그 원인이었다. 현수막에 새겨진 문장을 다 죽어가는 잿빛 눈으로 흘겨본다.

 

 

『잠뜰! 한국에 돌아온 걸 환영해!』

 

 

천천히 다가가자 공룡의 양옆에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라더와 불만이 가득한 듯 중얼거리며 짜증을 내던 덕개가 있었다. 잠뜰은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이마를 짚으며 잠시 고민하다가 행동을 취했다.

 

 

“잠뜰~ 한국에 온 걸 환영, 으악! 폭력반대!!”

 

 

첫째, 저 얄미운 선배인지 뭔지 모를 공룡이라는 사람을 한 대 때려준다. 둘째, 그가 들고 있던 현수막을 돌돌 말아 아무에게나 들라고 툭 던진다. 마무리를 지은 후, 짐을 끌고 앞장서는 잠뜰이었다. 뒤에서 공룡의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아무튼, 이게 그들의 소란스러웠던 한국에서의 재회였다. 이런 일들을 겪은 후, 순차적으로 미리 잡아두었던 펜션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이동했다. 공룡의 능력으로 말이다. 오랜만에 겪는 기이한 순간이동에 없던 멀미가 생길뻔했지만, 다행히 큰 무리 없이 넘어갔다. 도착하자 훅 끼쳐오는 겨울 바다의 향이 물씬 풍겨지는 펜션에 도착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색의 곱슬한 머리카락, 파스텔톤의 카디건,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성. 그가 뒤를 돌아보자 노을을 담은 듯한 주황빛의 눈이 자신을 본다.

 

 

“잠뜰아, 오랜만이네?”

 

“수현쌤!”

 

 

선생님이라니 그것도 벌써 낯간지러운 호칭이네, 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였다. 자신과 그들의 재회를 미리 예지해주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하자 부드러운 웃음이 들려온다. 오랜만의 온기였다.

 

그 후에는 자연스러운 대화가 흘러갔다. 어떻게 지냈는지는 아이들에게 들었다며, 혼자서도 잘 지내준 것 같아 스승으로서 자신은 뿌듯하다고, 뻔하지만 그럼에도 따뜻한 문장이 차례로 흘러나오며 감싸준다. 수현은 잠뜰 옆에 멈춰있던 짐을 바라보고 아차, 하며 방으로 이끌어주었다. 여기에 짐을 풀고 나오면 된다고 덧붙여 설명도 해주었다.

 

그렇게 짐을 풀고 나면, 잠깐의 소란스러움에 망각하던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겨울 바다, 찬 공기와 뒤섞인 소금물을 머금은 바다 내음이 느껴졌다. 짐을 정리하고 옆에 있던 창문으로 발을 이끌며 밖 풍경을 눈에 담으니 모래사장의 바다가 보였다. 파도가 잔잔하게 치며 모래를 머금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풍경. 잿빛의 눈에 푸른 바다가 담긴다.

 

생각해보니 세계여행을 해놓고서, 그렇게 많은 비행을 하고서, 자신의 눈에 직접 바다를 담은 게 언제였던가. 오랜만의 바다였다.

 

 

‘오랜만의 바다…’

 

 

덕개의 말이 떠오른다. 자신을 설득할 때 말했던 오랜만의 바다라는 단어의 짜임. 자신이 자각하지 못했던 생각을 끄집어낸 그가 꽤 선배다운 행동을 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그 잠자길 좋아하는 귀찮음 많은 선배라면 우연일 수도 있지만, 아무렴 어떠냐는 마음이었다.

 

늦게 도착한 탓일까, 안 그래도 짧았던 겨울의 낮에 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했구나, 그 생각을 하자 밖에서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고기 향이었다. 아직 정리 못한 짐이 없나 눈으로 대강 훑어보고 방문을 열자 테라스 쪽에서 고기를 굽는 수현과 라더가 눈에 보였다.

 

 

“아, 잠뜰아 나왔구나? 마침 부르려고 했어!”

 

 

수현이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어 라더도 잠뜰에게 오라며 불렀다. 잠뜰은 고기의 향에 이끌린 듯 다가갔고 수현은 다 구워진 고기를 작게 잘라 내밀었다. 장시간의 비행과 공복. 그 고기의 유혹을 이겨낼 인내심을 가진 사람을 적을 것이라고, 잠뜰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기를 입에 넣었다. 역시나 맛있었다.

 

 

“맛있지? 공룡이랑 덕개가 잠뜰이 네가 오기 전에 장 보며 사 온 거야.”

 

“오, 선배들이 그런 걸 할 줄 알았어요?”

 

“야 잠뜰~ 선배들이 사 왔는데 그런 소리 하면 네 것만 쏙 빼버린다?”

 

 

언제 온 건지 손에 검은색의 비닐봉지를 든 채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공룡이 눈에 보였다.

 

 

“안 보인다고 했더니 거기서 나오시네요. 손에 든 건 뭐예요?”

 

“아, 이거? 우리끼리 술 먹어본 적 없잖아? 그래서 이 내가 쏜다는 말씀!”

 

 

공룡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가득 들어찬 맥주캔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덕개의 손에는 자잘한 간식거리와 또 다른 맥주캔이 들어있었다. 불안감이 들지만, 무시했다. 저 선배 술주정 부리면 어디에다가 던져버려야지, 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공룡의 뒤에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성인이 돼도 철이 없는 건 똑같네요. 경각심을 좀 가지라니까?”

 

 

그렇게 말하며 공룡과 덕개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뺏어 들며 말하는 검은 장발의 남성, IPS 국장 각별이었다. 공룡은 멈칫하다 허망하게 뺏긴 비닐봉지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무어라 말했지만, 각별은 돌려줄 생각이 없는듯했다.

 

 

“하지만 이렇게 넷이서 노는 건대! ! 그 안전 가옥에서도 성인 되고 음주는커녕 나가게도 못하게 해놓고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당신 저번에 술 마시고 여기저기 텔레포트 해서 저만 속 썩이는 거 기억 안 나요?”

 

 

말 한마디에 끄응거리며 입을 닫았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공룡은 계속 불만스럽게 중얼거렸기에 별수 없이 맥주 4캔을 던져주고 말았지만 말이다. 쪼잔하게 4개만 준다며 구시렁대지만, 입가로 호선을 그리는 공룡에 어이없는 표정이 절로 나오는 잠뜰이었다.

 

공룡을 바라보다 그 옆에 나타난 각별을 본 것은 자연스러웠고, 금색 눈과 마주쳤다. IPS의 국장, 검은 장발을 길게 늘어뜨린 무거운 분위기를 가졌던 남자. 그런 기억으로 남았기에 갑작스러운 만남은 당황스러운 감정을 주었고, 그 감정은 부정적인 생각이 이어졌다. 혹시나 하는 걱정은 무색하게도 그는 담백하게 인사에 사라졌지만 말이다.

 

각별은 공룡에게 캔을 쥐여준 후, 고기를 굽고 있던 수현과 라더 곁으로 다가가 라더와 역할을 교체했다. 집게와 가위를 건네준 라더는 수현에게 고기가 담긴 접시를 받고서 그것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나머지 셋을 불렀다.

 

고기의 향기에 이끌리듯 나머지 셋이 테이블에 착석하는 건 빠르게 진행되었고, 젓가락이 그릇으로 향하는 것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걸 흐뭇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수현과 그런 수현과 네 명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각별은 덤이었다. 달달 씁쓸한 술과, 따뜻한 고기가 입에 들어온,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니 라더야, 너 뭐 준비했다며 보여줘 봐라!”

 

“엣, 그건 또 어떻게 기억한거야.”

 

 

라더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공룡을 바라보았다. 공룡은 잔말 말고 빨리하라며 부추겼고, 알코올이 들어간 덕개는 이를 거들었다. 각별과 서로 눈을 마주치고 그의 승낙이 떨어지자, 머리카락이 붉게 물들고 손가락을 튕기자 어디선가 작게 치익, 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어 들려오는, 폭죽 소리.

 

불꽃놀이였다.

 

 

“키야~ 술맛 좋다!”

 

“저 주정뱅이… 기절시켜버릴까….”

 

 

조용하던 라더도 술이 들어가니 조금은 솔직해진 듯 거칠게 말했지만, 공룡은 신경 쓰지 않고 간식거리를 입에 넣을 뿐이었다. 그런 둘은, 이를 뒤로 미뤄두고 불꽃놀이를 황홀하게 바라보는 잠뜰을 알아차리고 점차 조용히 소리를 죽였다.

 

잿빛의 눈에 들어찬 불꽃놀이는 황홀했고, 아름다웠다. 예전의 기억이 고개를 내민다.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그들과 함께하던 그때. 동아리에서 전교 1등이라며 호들갑을 떨고 바다에서 불꽃놀이를 하던 그 청춘의 한편을. 그때도 바다의 모래사장 위에서 청춘을 즐겼다. 바다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다시 그 바다의 끝자락에 앉아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추억을 되풀이하고 있다. 되풀이라,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쁘지 않은 반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잠뜰의 생각을 읽고 덕개는 뿌듯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라더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라더 역시 쾌활한 미소를 짓고서 자신이 준비한 불꽃놀이를 눈에 담았다. 붉은색으로, 초록색으로, 주황색으로, 푸른색으로. 제각기 흩날리며 터지는 불꽃들은 하늘을 수놓으며 아름답게 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늘에는 화려한 불꽃이, 땅에는 모래사장을 집어삼키고 뱉어내기를 반복하는 푸른 바다의 파도가. 잿빛의 눈에 그 풍경이 들어찬다. 오랜만의 바다는,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의 바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만족감을 가득 채워주었다. 한 겹 덮어두던 청춘의 첫 페이지를 다시 되새기는 게 행복함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지금, 바다 너머 청춘의 끝자락에서 또다시 추억을 겹쳐가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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