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와 인간
w. 와구 (@Wagu_SD)
내 이름은 정공룡. 낭랑 24세. 직업은 해적, 경력은 3달.
현재 표류 중이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어느 드넓은 바다 위. 반파된 돛단배에 겨우 몸을 기댄 채 드러누워있는 한 사람, 자칭 해적 정공룡은 현재 이틀째 망망대해에서 표류 중이었다. 내 인생아. 공룡이 소매로 땀을 닦아내며 하늘을 바라봤다. 괘씸하게도 더럽게 맑았다. 불쑥 찾아온 태풍이 애지중지하던 제 첫 배를 부수고 물과 식량마저 앗아간 게 없던 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번 주의 바다는 잔잔할 거라고 했는데. 공룡이 안심하고 떠나라며 제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줬던 마을 통발 아저씨를 떠올리고는 속으로 원망했다.
눈만 굴려 힐끔 옆을 쳐다보니 꽁꽁 싸매놓은 식량 주머니가 흐줄근하게 늘어져있는 게 보였다. 식량도 이제 다 떨어지고 있었다. 근처 섬에 정박할 예정이라 조금만 싸온 게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다니. 게다가 이 항로는 어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 배도 흔히 지나가곤 하는데, 정작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번에는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다. 그냥 운이 존나게 없는 게 분명했다.
"아, 내 이름을 바다에 떨쳐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죽는구나. 어머니 불효자는 갑니다⋯⋯."
해적이라는 미래를 선택했을 때부터 아주 잘 불타는 효자가 되었던 공룡이 우는 소리를 냈다. 다음 섬에서부터는 동료도 구해보려고 했는데. 흑흑. 다 망했어. 준비한 돈도 절반 이상이 파도에 떠밀려갔고, 여기는 어딘지도 모르겠고. 상황을 곱씹을수록 불행만 가득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으니 공룡이 어기적 몸을 일으켜 부서진 반쪽짜리 노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해가 떠오르는 방향으로 젓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어제도 별 진전이 없었지만, 남아도는 시간을 그대로 내다 버리긴 아까웠으니 계속해서 영혼 없이 저었다. 이러다 보면 뭍으로 가든지 익사 하이패스 길을 밟든지 하겠지, 망할. 힘 빠진 팔이 휘적휘적 노를 움직였다. 아주 조금이지만 이동을 하고 있는 거 같기는 했다. 이대로면 한 1997년쯤 후에는 도착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 배가 출렁이며 위아래로 흔들렸다. 크게 휘청인 공룡이 당황하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방금 정도의 강도로 배를 흔들만한 파도는 밀려온 흔적은 없었다. 뭐지, 착각인가. 머리를 긁적인 그는 털썩 주저앉아 노를 수면 위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배가 또 흔들리며 반파된 배에 물을 한 바가지 쏟아부었다. 안 그래도 쫄딱 젖은 꼴이던 공룡은 또 한 번 물에 적셔졌다. 위태롭게 수평을 유지하던 배는 충격을 받자 약간 기울어졌다. 아 뭔데! 공룡이 신경질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검은 형체가 배 밑을 지나갔다. ⋯⋯응? 공룡이 제 눈을 비비고는 멍청하게 수면을 응시했다. 그새 검은 형체는 10m 정도 떨어진 곳까지 멀어져 있었다. 심지어 꽤 멀어졌는데도 크기가 반파되기 전 공룡의 돛단배보다도 컸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상어⋯는 아니겠지.
갑자기 땀이 비처럼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공룡이 한 번도 믿은 적 없는 신에게 기도를 했다. 앞으로 더 착하게 살 테니까 살려주세요⋯. 아멘.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신은 없었다. 기도가 끝나길 기다리기라도 한 듯 검은 형체는 뱀처럼 슬그머니 공룡에게 다가왔다. 한쪽 눈을 슬쩍 뜬 채 제 기도의 결과를 확인하려던 공룡이 그 모습을 보고는 파다닥 뒤로 물러섰다. 얄궂은 검은 형체는 점점 더 커지더니 결국 수면 위로 튀어 오르며 정체를 드러냈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공룡이 경악했다.
"미친, 고래??"
깔끔한 점프쇼를 보여준 고래는 몸을 뒤집으며 다시 물속으로 사라졌다. 입을 쩍 벌린 공룡이 눈을 굴려 그의 그림자를 쫓았다. 아직 어린 개체인 듯 크기는 작은 편이었지만, 공룡 정도는 간식으로 한입에 해치울법한 고래가 제 자태를 자랑하며 배 주위를 맴돌았다. 내 사인이 고독사도 익사도 아사도 아닌 고래먹이사라니. 공룡이 헛웃음을 지었다. 시체도 못 찾게 생겼네 이거.
그러나 걱정과 달리 고래는 위협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배 주위를 8번째 맴돌았을 때 공룡은 그제서야 딱딱하게 굳은 등 근육을 움직였다. 뭔가 이상한데. 슬쩍 몸을 바깥으로 빼 자세히 관찰해 보니 고래가 움직이며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게 몸통뿐만이 아니었다. 한번 지느러미가 흔들릴 때마다 같이 흔들리며 튀어 오르는 길고 가는 물체가⋯⋯ 저거 설마 그물인가?
"⋯지느러미에 그물이 걸렸네."
풀어달라는 거였나? 경계심이 누그러든 공룡이 슬금슬금 움직였다. 눈이 마주치자 고래는 빙빙 도는 것을 멈추고 기다렸다는 듯이 공룡에게 헤엄쳐왔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공룡이 침을 꿀꺽 삼켰다. 가까이서 보니 상태는 더 좋지 않았다. 고래의 오른쪽 지느러미 끝부분을 둘러싼 낡은 그물이 외피를 손상시키고 있었다. 지독하게 꼬여있는 게 어지간히 오래 저걸 달고 다녔구나 싶었다. 맥가이버 칼을 꺼내든 공룡이 허리를 굽혀 조심스레 그물을 하나씩 끊어냈다. 혹시 저항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그렇게 행동하면 제가 자신을 돕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래는 영리하구나.
그물이 많이 헤져있어 끊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5분이나 걸린 해체 작업이 마침내 끝나고 그물이 고래의 지느러미에서 떨어져 나왔다. 공룡이 그물을 옆으로 치워주자 고래가 기쁜 듯 이리저리 헤엄쳤다. 괜히 뿌듯해진 기분에 공룡이 코를 슥 닦았다.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이렇게 또 선의를 한번 베풀다니. 굿 공룡 굿 공룡. 그럼 이제 다시 노질을⋯⋯.
"오우, 이제 좀 살만하네. 고맙다 야."
⋯⋯응? 공룡이 제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말소리가 들렸는데.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그러다 문득 공룡은 고래와 눈이 마주쳤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설마 쟤는 아니겠지. 그래, 그건 좀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내가 헛것을 들었나 보지.
"뇌에 문제 있냐? 나 여기 있잖아. 분명히 들릴 텐데."
동굴처럼 울리는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에 들려왔다. 애써 모른척하려던 공룡의 손에서 노가 툭 떨어졌다. 옆으로 돌아선 공룡의 앞에 나타난 고래가 투정이라도 하듯 꼬리로 수면을 탁 쳐 물을 튀겼다. 마치 날 보라는 듯했다. 저 행동을 이렇게 해석하는 자신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공룡이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고래가⋯ 말을 하네⋯?
고래가 말을 한다. 24년 인생 살면서 듣도 보도 못한 말이었다. 아니, 저걸 말을 하는 거라고 봐야 하나? 지금 머릿속에 들려오는 말은 귀를 거쳐 뇌에 흘러들어오는 게 아니라 직접 머리에 내리꽂히는 형식이었다. 흔히 말하는 텔레파시처럼. 그 증거로 고래는 직접 입을 열지 않았다. 애초에 저 말 속도로 고래 입이 움직인다면 그건 그거대로 호러일 것이다. 고래의 입이 인간의 입술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한 공룡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인간한테 말 거는 건 처음이라 실수했나? 근데 저 반응을 보면 제대로 한 거 맞는데. 야, 들리면 대답 좀 해봐."
"어, 어. 들려."
"뭐야, 됐네. 너 표류 중이야? 배 꼬라지 보면 그런 거 같은데."
"어⋯⋯. 어."
"그렇게 충격적인가. 애가 바보가 됐네. 아니면 표류한다고 이미 정신줄 놔버린 상태였을지도⋯."
아니 내 정신줄 아직 멀쩡하거든. 공룡은 살짝 억울해졌다. 니가 내 상황이 되어봐라, 말문이 안 막히나! 하지만 고래에게 따지려 드는 건 포기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고래와 말이 통한다는 게 상식에서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저 녀석이 이해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너 어디서 출발했는데?"
"⋯매스턴."
"목적지는?"
"리오메르아."
"엥. 바로 옆이네. 여기서 표류하는 것도 웃기다. 아무튼 네가 날 도와줬으니까 데려다줄게. 너 노 젓는 거 보니까 아예 반대 방향으로 젓고 있더라."
방금 네가 하던 짓은 50%의 확률 중에서 익사 하이패스 길이었다는 걸 통보받은 공룡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은혜 갚는 고래거든. 당당하게 말한 고래가 얼굴을 수면 아래로 감췄다. 고래는 천천히 배 뒤로 돌아가 수면과 가까운 아랫부분에서 앞을 향해 헤엄쳤다. 그러자 생긴 거센 물살에 배가 떠밀려 서핑보드마냥 앞으로 밀려갔다. 쿵, 미는 힘에 넘어져 엉덩방아를 찍은 공룡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데려다준다는 게 이런 의미였어? 고래가 손이 달린 것도 아니니 이런 방법밖에 없겠지만 이게 효율적인 건가, 의문을 품자마자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듯 배가 빠른 속도로 밀리기 시작했다. 묵직하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뺨이 얼얼해지자 공룡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야, 야 잠깐! 너무 빨라!! 내 배 반파된 거 안 보여?!"
"하여튼 인간들 엄살은⋯⋯."
배 아래에서 파도를 만들어내던 고래가 혀를 차며─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진짜 그렇게 들렸다─속도를 늦췄다. 날카롭고 위협적인 소리가 곧바로 잦아들었다. 느리게 나아가는 모터보트와 같은 탑승감에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긴장이 풀린 공룡의 입꼬리가 슬 올라갔다. 짜릿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쐬자 당혹감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져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자리를 흥분과 호기심이 차지했다.
개 레전드. 고래가 내 배를 밀어주고 있어. 바다에서 가장 위대한 항해사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공룡의 눈이 반짝였다.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은 정말,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불운 속 찾아온 행운과 말하는 동물. 말 그대로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스토리 아닌가. 그렇다면 이 동화의 주인공은 나? 공룡의 가슴이 부풀었다. 그가 기대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아깐 정신없어서 소개를 안 했네. 내 이름은 공룡이야. 넌 이름이 뭐야? 이름이 있나?"
이름?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고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대답은 간단하게 돌아왔다.
"잠뜰이라고 불러."
"오, 어떻게 고래 이름이 잠뜰⋯."
"네가 할 말은 아니지, 공룡."
저 심해 밑바닥에는 아직 네 화석들이 남아있는데. 구경하고 싶어? 잠뜰이 산뜻한 어투로 섬뜩한 말을 내뱉었다. 공룡이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코웃음 치듯 고래의 숨구멍에서 퓩 하고 작은 물줄기가 뿜어 나왔다.
"내 이름이 인간의 발음으로는 잠뜰에 가장 가깝거든. 진짜 이름은 알려줘도 못 부를걸."
잠뜰이 태연히 흘린 말에 공룡은 다시 눈을 반짝였다. 저런 인외 같은 발언 너무 좋아. 신비함에 환장하는 공룡이 주먹을 꾹 쥐었다. 말하는 고래. 바다의 기적이 눈앞에 있다. 해적이라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는 법이다. 그건 해적에 대한 모욕이지, 암. 배가 수면에 닿는 부분에서부터 위협적으로 물이 튀고 있었지만 공룡은 한걸음 더 가까이 잠뜰에게 다가갔다. 무언가 불안감을 감지했는지 잠뜰이 힐긋 공룡을 흘겨봤다. 공룡이 모 애니메이션에서 본 것처럼 손가락을 척 가리키며 당당하게 말했다.
"너 내 동료가 돼라!!"
"싫어."
"아아 왜."
"인간이랑 고래가 어떻게 동료가 되냐?"
"그건 편견이야! 동료 좀 될 수도 있지! 참고로 난 편견 없는 사람이야."
"편견 좀 있어라."
어쩐지 질린다는 듯한 반응으로 잠뜰이 커다란 고개를 휘적 저었다. 0.1초의 틈도 없이 거절당하자 공룡이 시무룩해졌다. 고래를 동료로 삼은 최초의 해적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나 안 데려다주고 그냥 간다?"
"죄송합니다."
그래 내가 을이지⋯. 입술이 툭 튀어나온 공룡이 배 끝부분에 등을 기대고 털썩 앉았다. 턱을 괴고 앞을 바라보니 명화의 한 폭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름다운 바다와 시원하게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 적당히 따스한 햇살, 피부를 간지럽히는 물방울들까지. 날이 좋았다. 이 좋은 날에 제 숨이 멈춰버릴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까는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죽기 싫었다. 같은 말 아니냐,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겠지만 공룡에게는 아니었다. 죽음을 목도한 상태에서 삶을 갈구하는 것과 삶의 아름다움 앞에서 죽음을 거부하는 게 어찌 같겠는가?
젖고 찢어진 옷들은 이 평화를 해치는데 어떠한 방해도 되지 않았다. 공룡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가로로 길게 이어진 수평선 아래로 부드럽게 유영하는 고래의 꼬리 부분이 보였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던 공룡이 입을 열었다. 동료 하자. 싫다고. 동료. 싫. 동. ㄴ. 한참 동안 그런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갔다. 공룡이 따가운 목 상태도 신경 쓰지 않고 젖혀진 기도로 크게 웃었다. 잠뜰이 미쳤냐고 말하는 소리가 작은 메아리처럼 뇌리에 꽂혔다. 당연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온통 신비로움이 저를 감싸고 있었으니.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수평선에선 희미한 섬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낮잠을 자듯 편하게 몸을 뉘고 있던 공룡이 눈살을 찌푸려 섬을 확인했다. 중앙에 거대한 탑이 있는 걸 보니 리오메르아가 맞았다. 진짜 근처였네. 조금 황당하고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잠뜰이 밀어주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던 건지, 내가 멍청하게 목적지 근처에 다 와서 죽을뻔했던 건지. 뭐 어쨌든 도착했으니 된 거지⋯⋯.
⋯⋯그런데 이대로면 얘랑 헤어져야 하는 건가? 벼락처럼 든 생각에 공룡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예상보다 이별의 시간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 공룡이 배 아래로 고개를 숙여 급히 고래의 얼굴 부위를 찾았다.
"헤이, 헤이, 잠뜰. 잠깐만."
"왜."
"⋯그, 좀 쉬었다 갈까? 안 힘들어?"
잠뜰이 또 무슨 꿍꿍이냐는 눈빛으로 공룡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나 팔팔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속도를 더 냈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던 섬이 점점 선명해지고 크기가 커지는 게 실시간으로 보이자 공룡이 초조한 마음으로 팔을 휘적거렸다.
"일단 저 구석에 가서 멈추자. 항구에 가면 너무 눈에 띄겠지? 그치?"
"중간쯤에 버려두고 나머지는 알아서 가라고 하려 했는데."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 아니다. 진짜 이대로 갈 거야? 정말 아무 미련도 없어?"
잠뜰이 움직임을 멈췄다. 거대한 존재의 움직임에 정신 사납게 출렁이던 바다가 차분해졌다. 드디어 이야기를 들어줄 낌새가 보이자 공룡이 큼, 목을 가다듬고는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자, 자. 들어봐. 손바닥이 금이 가고 눅눅해진 판자를 탁탁 쳤다. 잠뜰은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분위기를 잡아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말하려다가 또 꼴값을 떨까 봐 그만뒀다.
"모든 생명체는 꿈이 있지."
공룡이 진지한 얼굴로 서두를 뗐다. 앞통수가 따가운 시선은 무시했다.
"나도 세상을 더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에 바다로 나왔고. 목적 없이 살아가는 존재는 없어. 하다못해 살아야지, 라는 기본적인 생각조차 삶을 유지하는 이유가 돼. 그건 세계를 돌아가게 하는 하나의 톱니바퀴이자 필수적인 요소야."
"⋯어울리지 않게 철학적인 소리를 하네. 그래서?"
"그래서! 너도 무언가 꿈이 있을 거란 이야기지! 이 드넓은 바다에서 심해 구경만 하다가 죽을 거야? 안 그래도 고래는 오래 사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공룡이 앞으로 고개를 쭉 빼고는 손을 내밀었다.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당연히 악수를 청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 행동의 의미는 이해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랑 같이 모험을 하자. 세계를 탐험하고, 그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경험을 쌓는 거야.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되겠지."
나는 너를 오늘 처음 봤지만, 동류는 동류끼리 알아본다고들 하지 않는가. 이 해역은 한없이 넓지만 너에게는 우물이나 마찬가지일 테지. 우리는 우물 밖으로 벗어나는 거야. 혼자보단 함께가 낫잖아?
어쩌면 이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제안일지도 모른다. 겨우 인간 하나가 무얼 안다고 고래의 삶을 우물에 비유할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잠깐의 시간 동안 봐온 네 성격을 감히 조금이나마 파악해 봤을 때, 내가 꺼낸 제안을 바로 거절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줬다는 점에서 너는 이미 내게 답을 내어준 거나 마찬가지다. 커다란 고래의 눈알이 느리게 아래로 굴러 내밀어진 손을 향했다. 그 묵직한 시선과 침묵에 공룡의 목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설득이⋯ 됐나?
흐음─ 고민하는 듯 늘어지는 소리가 울음소리처럼 가늘게 울려 퍼졌다. 공룡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고래는 유유히 배 주위를 헤엄쳤다. 후두둑 튀어 오른 물이 수면에 부딪히며 하얀 거품을 만들어냈다. 배의 주변은 어느새 잘게 피어난 메밀꽃이 가득했다. 고래는 제가 피워낸 꽃밭 틈을 헤집었다. 맑고 잔잔한 수면에 하늘이 비쳐 보이는 배경까지 더해, 공룡은 저 모습이 마치 하늘 고래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까처럼 막무가내로 우기는 것보다는 낫네. 진작에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
공룡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 말인즉슨⋯?
"난 재미없는 건 싫어."
"나도!"
"뭘 나도야. 언제든 너랑 다니는 게 재미 없어지면 다시 떠날 거라는 소리라고."
잠뜰이 착각하지 말라는 듯 말했지만 공룡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수락 맞지? 이거 수락한 거 맞지? 나랑 다닌다잖아!! 머릿속이 축제 한복판에 있는 것보다 더 시끄러웠다. 공룡이 멍하게 있자 잠뜰이 말을 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어딘데?"
"베스티아. 마법사의 도시래. 워낙 폐쇄적인 곳이라 알려진 정보가 없다던데, 그 도시 근처의 해안에는 결계가 쳐져 있어서 악한 마음을 품은 자는 통과하지 못한다는 소문은 있어. 아, 참고로 나는 해적이지만 착하니까 괜찮을 거야. 아마도? 아무튼 마법이라니까 꼭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더라고. 너도 궁금하지?"
"마법이라⋯⋯."
랩처럼 줄줄 읊는 말에도 잠뜰은 차분했다. 곧이어 픽 웃는 것처럼 뽀글뽀글 올라온 거품을 뚫고 물방울이 튀어 나오더니,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공룡의 귓가에─물론 착각이지만, 머릿속에 울리는 말을 평범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공룡은 잠뜰의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울렸다.
"그래, 뭐. 그건 흥미롭긴 하네."
"그럼 나랑 같이 가는 거야??"
"이 섬에서 준비하는 거 오래 걸리나?"
"동료⋯는 이미 구했으니까 배랑 식량이랑 몇몇 생필품만 다시 구하면 돼. 오래 안 걸려!"
"삼일 안에 준비 다 안 하면 나왔을 때 나 없을지도 모른다. 혼자 기다리는 거 지루하거든."
착각할 틈도 없는 명백한 답변이었다. 공룡이 내적 비명을 질렀다. 잠뜰은 마지막으로 배를 밀어 해안가 근처로 보냈다. 수위가 낮아 잠뜰이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자 공룡은 헐레벌떡 배에서 내려 섬 안쪽으로 달려갔다. 이틀 만에 준비하고 나올게! 기다려!! 뒤를 돌아보며 소리치니 잠뜰은 대답의 표시로 숨구멍을 통해 얇은 물줄기를 찍 뿜어냈다. 공룡은 밝게 웃으며 멈추지 않고 달렸다. 마을이 근처인지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섬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모험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