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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유제이 (@7_xstion)

染 : 물들일 염

 

 

이른 아침부터 바다 위를 떠다니는 작은 보라색 종이배는 점심이 오기도 전에 바다 너머로 사라진다. 지나가던 누군가 바다에서 건져냈거나, 아니면 파도가 묻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바닷가로 무언가 떠내려오는 흔적은 없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건져냈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부터 다시 비 온대.'

 

'학교 나오기 벌써 싫어진다.'

 

'우산 안 챙겨서 나한테 빌려 갈 생각은 하지 마···.'

 

시끄러운 교실 속 잠뜰은 창가 측 가장 앞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첫 교시 시작한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바다 위 보였던 종이배는 진작에 사라졌다. 이주 전부터 바닷가에서 발견되기 시작한 그 종이배의 주인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방학했는데도 자습하기 위해 등교하는 학교에서도 어느새 종이배 소문은 널리 퍼졌다. 발견된 흔적은 없다는 둥. 사실 주인은 귀신이라는 둥. 아무도 주인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학교의 수많은 학생 중 잠뜰만 유일하게 종이배를 바다 위에 띄우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주인을 알고 있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데, 동시에 당연하다고 할 수 없었다. 배의 주인은 잠뜰의 친구면서 친구가 아니었다.

 

 

 

 

"여기서 또 뭐해."

 

자습 끝나고 바닷가를 따라 걷다 바위 뒤편에서 수현을 발견한 잠뜰이 물었다. 그러면 수현은,

 

"보시다시피."

 

라며 쭈그렸던 몸을 일으켜 가볍게 스트레칭했다. 무얼 하고 있는지 말하지는 않는다. 한두 번 마주한 상황은 아닌 듯한 잠뜰은 익숙하게 수현이 벗어둔 신발 옆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접힌 흔적도 구겨진 흔적도 없는 깨끗한 보라색 에이포 용지. 이걸로 그가 무엇을 할지는 뻔했다. 이주 전부터 매일 보였던 그 종이배는 전부 수현이 만들고 바다 위에 띄운 것이다. 자습 끝나고 도서관 갔다 집 가는 길에 밤바다 구경할까 잠깐 고민하지만 않았어도 잠뜰은 바닷가를 걷다 수현을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일주일 전의 황수현은 이곳에 이사 온 거라고 했다. 그러면 전학 오는 것이냐 물으니 맞다고 대답했다. 그는 잠뜰의 또래처럼 보였고, 이 동네에 고등학교는 잠뜰 자신이 다니는 곳밖에 없었으니 수현이 전학 오는 곳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처음엔 동갑인 줄 알았기에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후에 나이를 물어 한 살 어린 동생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잠뜰은 누나 호칭 붙여서 말하라고 했지만.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수현은 다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무언가 찾으려는 듯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사라지려고 하네."

 

"뭘 말하는 거야?"

 

"종이배."

 

저기 보이지? 수현의 손끝을 따라 바라본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보여주려는 게 그새 사라진 것인가 싶어서 잠뜰은 눈썹을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벌써 사라졌네."

 

"아니야, 아직 눈에 띄는 곳에 잘 있는 걸."

 

초록색이라서 잘 보이는데···. 작게 중얼거리는 말들이 귀에 제대로 들어왔는데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잠뜰은 지금이라도 여기서 벗어날까 생각했다. 헛것을 보는 사람이라니. 보이지도 않는 초록색 종이배를 찾으려는 사람과의 원만한 대화는 어려울 듯했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잠뜰을 수현이 불러 세웠다. 잠깐만 놀아줘, 너 할 거 없잖아. 있는데? 없는 거 알거든.

 

"그리고 너한테 저 배 안 보이는 거 알아."

 

"알면서 나한테 물어본 거야?"

 

"내가 환각을 보는 게 맞나 확인해야지. 나도···. 저 배가 보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만 도와주면 보내줄게. 수현이 웃는다. 자기 눈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데, 그걸 보이지 않게 해주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바다 위로 보이는 게 초록색 종이배, 그렇다면 수현이 이곳에만 오면 보인다는 것이겠다. 애초에 배를 안 보면 되는 것 아닌가? 일단 대안을 제시하자는 생각으로 잠뜰이 말했다. 여길 오지 않으면 되지.

 

"뭐 하러 여기서 그걸 보고 있어, 바다를 떠나면 될 일인데."

 

"바다 냄새라도 맡아야 해서 오는 거야. 숲이 싫거든."

 

"숲 냄새가 싫다는 거야?"

 

"그렇지 뭐. 정확히 그 냄새는 아니었지만, 숲도 싫고, 냄새도 싫고, 그 색조차 싫고. 친구는 그걸 좋아했거든. ···말해봤자 모를 텐데 그냥 넘겨."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잠뜰은 여전히 수현의 생각을 모르겠다. 바다 냄새가 무언갈 덮을 정도로 그렇게 진한 건가. 냄새라는 단어가 기억에 강하게 남아서, 그다음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친구에 대한 말은 한 귀로 흘렸다. 숨을 몇 번 들이키며 킁킁거려도 몸을 가득 채우는 건 소금기 있는 바람의 내음밖에 없었다. 바다 근처에서 몇 년을 살았기 때문인지 잠뜰에게 그 내음은 이젠 희미하게 맡아지는 익숙한 고향 친구 같을 뿐이었다. 그만큼 생각날 때마다 찾아오고 싶은 편한 장소 중 하나. 하지만 이게 수현에게 간절한 이유를 모르겠고, 하필 초록색의 배가 그의 눈에 보이는 이유도 모르겠다. 숲 때문에 배가 초록색으로 보이는 걸까. 환각은 보통 허상이니···. 그렇다면 존재하는 무언가로 환각을 덮을 수는 없을까.

 

"존재하는 걸로 덮어버려."

 

"존재하는 거?"

 

"초록색 종이배가 자꾸 보여서 문제라면, 실제 종이배를 바다에 띄우면 저건 사라지겠지."

 

"뭐야? 진짜 똑똑하네."

 

"에이, 그쯤이야. 난 이만 간다."

 

"아직 할 얘기 남았는데?"

 

잠깐 있어 봐. 수현의 말에 다시 몸을 돌렸다. 딱히 할 만한 얘기는 더 없는 것 같았는데. 불만 있는 듯한 눈빛을 알았는지 수현이 말을 이었다. 내일도 이쪽으로 올 거 아니까, 오면서 종이 좀 사다 주라. 나는 돈이 없어서. 참 당당하다. 어이가 없었지만 정말로 잠뜰은 내일도 이 바닷가를 지나가야만 한다. 집 가는 방향이 이쪽인 걸 어쩌겠어. 한숨이 나왔다. 아무래도 이상한 친구가 생겼네.

 

 

 

 

문득 생각나 그 말을 하니 수현은 '친구 아닌데?'라며 선을 그었다. 말동무라고 해줘. 어차피 전학 오면 친구 되는데. 아, 정확히 하자면 선후배 사이겠네. 잠뜰은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만나고 며칠 동안 너라고 자연스럽게 불렀던 수현을 계속 놀리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 누나는 보기보다 너그러우니 넘어가겠다, 라고 하며 농담조로 말했다. 어쨌든 자발적 외톨이, 뭐 그런 건가. 어제도 똑같이 종이배 접었던 기억에 의존하며 꾸깃꾸깃 종이 접어가는 수현의 통수가 제법 웃겼다. 이왕 바다에 띄우는 거, 좋아하는 색의 종이로 만들고 싶다는 수현의 말을 떠올리며 보라 색지를 한 뭉텅이로 샀었다. 다음 날 포장지 뜯기지 않은 두꺼운 에이포를 건네니 꽤 센스 있다는 소리 들었다. 흰색으로 샀으면 이거 아니라고 한마디 했을 것 같은데. 개학까지 일주일 채 남지 않았는데 그전까지 수현이 계속 바다로 올지 떠날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많이 있는 걸로 사뒀다.

 

 전까지만 해도 손댄 흔적 없던 보라색 종이가 점점 배의 모양으로 잡혀가는 모습을 보는 건 이제 익숙했다. 어제도, 그제도, 그 전날도, 매일 밤에 바닷가를 지나갈 때면 바위 뒤편 구석에서 쭈그리고 무언가 하는 것 같은 수현의 뒷모습을 봤었다. 다음 날 학교 가려고 아침에 다시 지나가면 보이는 바다 위 종이배가 전날의 상황을 알려주는 듯했다. 새벽에 바다에 띄운 채 사라졌다, 아침에 누가 볼까 얼른 치워버린 것이겠다.

 

그 종이 뭉텅이는 족히 백 장은 되는 것 같았는데 이 주일 지난 지금은 어느새 오십 장 남은 듯했다. 어디에, 얼마나, 그리고 왜 썼는지 모를 색지의 행방을 생각하며 잠뜰은 남은 종이의 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나. 잔잔한 파도 소리로 조용해진 주변이 신경 쓰였는지 수현이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어.

 

"사람이 색에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해?"

 

"그야 당연하지."

 

"그야?"

 

"지금 너가 그렇게 보여. 전에 초록색이 싫다느니, 이왕이면 보라색이어야 한다느니, 하는 게 영···."

 

색에 대한 집착을 좀 버려봐. 잠뜰의 말에 수현은 대꾸 없이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저건 도저히 이 누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다. 내가 어려운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슬쩍 바라본 핸드폰으로 벌써 집 들어가야 할 시간이라는 걸 확인한 잠뜰은 몸을 일으켰다. 수현은 수면 위에 배를 막 띄우던 참이다. 벌써 가려고? 그가 물었다.

 

"그런 대답만 하고 가겠다는 거야?"

 

"나름 조언했잖아. 왜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보는지 모르겠고, 색깔 그게 뭐라고 이렇게···. 나는 이해가 안 되거든. 너가 바다로 올 수밖에 없다는 그 미련을 버리면 그래도 조금은 괜찮아질 것 같은데."

 

아무튼 내 생각은 그래. 앉아있던 바위에서 내려온 잠뜰이 수현을 바라본다. 바닷바람을 오래 맞고 있었더니 정리되지 않은 머리칼이 슬 불쾌했다. 아직 띄우지 않은 보라색 종이배는 수현의 손에 있었다. 그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종이배의 모양은 조금 흐트러진 것 같기도 하다. 잠뜰은 자신을 바라보는 옆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낮에 학교에서 들은 얘기로 대화의 흐름을 다시 이끌었다. 내일부터 비 온다더라.

 

"그런 날씨에 종이배는 띄울 수 없으니까, 너가 한동안 여기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나중에 학교에서 보면 인사하자."

 

등을 돌려 수현에게서 멀어졌다. 잠깐 스쳐 본 움직이는 입 모양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뒤에서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겠지. 잠뜰은 수현이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비 그친 주말 밤에 바닷가로 나온 잠뜰이 바위 있는 곳으로 향했을 때 수현은 보이지 않았다. 남은 종이를 배로 접어서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지나친 바닷가 입구의 쓰레기통 아래에 깔린 보라색 종이 뭉텅이를 발견하고 그 생각은 빠르게 접었다. 비 오기 전에 버리고 갔는지, 몇 장 남지 않은 보라 색지는 물에 젖어 쪼그라든 것처럼 보였다.

 

개학날 학교에 도착한 잠뜰은 전학생 소식이 있나 궁금했다. 혹시 그가 나이를 속였을까 싶어서 자기 친구들에게도 물어보고 위 아래 학년 아는 선후배들도 찾아갔지만, 전학생 얘기는 전혀 없고 전학 간 사람만 한둘 있다는 대답밖에 듣지 못했다. ··· 그 애는 어디로 갔을까. 덥다고 켠 에어컨 때문에 교실의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혔다. 그런데도 창문을 뚫고 희미한 바다 내음이 느껴졌다. 여전히 시끄러운 교실 속 가장 앞자리에서 바라보는 창밖 바다의 진한 냄새가 몸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 ‘덧칠의 굴레’ 이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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