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날의 꿈
w. 파도 (@w__ave_)
새벽 공기가 저물어가고, 밝은 아침이 찾아왔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사이로 햇빛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자연을 깨우는 신호에 바람도 부드럽게 불어와 잠뜰의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오늘은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눈이 저절로 떠졌다. 왠지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잠뜰은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쭈욱 폈다.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햇빛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냈다.
이렇게 좋은 날에 학교를 가야한다는 건, 정말로 억울한 일이었다. 잠뜰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래도 자전거를 타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절그럭거리는 페달 소리가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어우러져 춤을 췄다. 매일 가던 똑같은 등굣길인데도, 오늘따라 색달랐다. 나무들이 서로 얽히고 섥혀 만들어진 덩쿨 동굴을 지나니 에메랄드빛 바다가 잠뜰을 맞이했다. 햇빛에 맞춰 반짝이는 윤슬이 시선을 어찌나 끌던지, 하마터면 중심을 잃어버릴 뻔했다. 나무들의 간격이 점점 늘어나고 바다가 안 보일 때 쯤이면, 학교에 거의 도착했다는 뜻이다. 잠뜰은 오늘도 첫번째로 등교를 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어떻게 밖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뜰은 항상 자신의 자리 위치 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이라며 합리화를 시켰다. 게다가 오늘 하늘은 어떤 날보다 아름다워서, 푸른 바다와 좋은 조합을 유지했기에. 잠뜰은 1교시를 바다에게 바쳤다. 바다를 계속 바라보다 보면, 말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마치 물 안에서 말하는 듯 흐릿하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자꾸만 잠뜰을 바다로 이끌었다.
사실 잠뜰에게 바다는 특별한 존재였다. 이 지역에 전학을 오고나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곳도 바다였다. 잠뜰이 처음 바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 여기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때 이후로 잠뜰은 학교가 끝나면 바로 바다로 달려갔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됐다. 친구와 다툼이 있었을 때도, 아끼는 머리끈을 잃어버렸을 때도. 바다는 말 없이 잠뜰을 위로해주었다.
정신을 차리니 학교가 끝나 있었다. 오늘은 잠뜰의 청소 순서여서, 잠뜰은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말 없이 설렁설렁 빗자루질을 했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학교 밖으로 나와, 자전거의 핸들을 잡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바다에 갈 모양이었다.
잠뜰은 잔잔한 파도 소리에 눈을 감았다. 평화로웠다. 손 끝에서 느껴지는 작은 모래 알갱이들의 촉감은 부드러웠다. 잠뜰은 문득, 눈을 살며시 떴다. 또 그 목소리였다. 들릴 듯 말 듯한 기포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푸른 그림자가 잠뜰을 휘감았다. 아니, 파도였다. 거대한 파도가 살결에 닿았다. 잠뜰은 본능적으로 눈을 꽉 감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는, 눈 앞이 온통 파랬다. 바다가 잠뜰을 푸른 바닷속으로 끌어당긴 것이었을까. 입에서 자그마한 공기 방울들이 세어나왔다. 잠뜰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잠깐, 바닷속에서 숨을 쉴 수 있던가. 생각에 잠기기도 잠시, 빠른 물살이 잠뜰을 이끌었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보였던 건, 바다를 뚫고 내려오는 밝은 햇빛과 그녀를 감싸는 작은 물고기 때였다.
아래로, 아래로. 더 아래로 하강했다. 주변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괜찮았다. 물고기들이 잠뜰을 빛이 새어나오는 곳으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겁이 나지 않았다. 빛이 잠뜰을 감싸 안았다. 너무나도 쨍한 탓에 눈을 제대로 뜨고 있을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잠뜰이 사람의 인영을 봤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 인영이 말을 했던 것만 같았다. 아니, 잠뜰의 이름을 불렀던가? 그리고 그 목소리는 한 번 더 들려왔다.
‘너의 청춘을 우리에게 주었으니. 우리는 우리의 추억을 너에게 들려줄게.’
시야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금세 푸른 바다가 자리를 차지했다. 다시 위로, 위로.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고기들이 잠뜰에게 인사를 건낸 것이. 그 기억의 끝자락이었다.
잠뜰의 눈이 번쩍 떠졌다. 바닷가에서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분명 꿈이었는데. 너무나도 생생했다. 잠뜰의 머리카락 끝이 살짝 젖어있었다. 쓸려오는 파도에 머리카락이 잠긴 것이었을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지만.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닷가에는 잠뜰 혼자 뿐이었다. 푸르게 빛나던 하늘에 점점 붉은 덩쿨이 피어났다. 저 덩쿨이 모두 얽히고 섥히고 나면 분명 완전한 어둠에 잠식되겠지. 잠뜰은 바다를 잠시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전거를 찾아 바닷가를 벗어났다.
그 때 이후로 신비스러웠던 경험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목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바다의 기억을 다시끔 보고 싶어 바닷가에 오랫동안 앉아있어도, 바다는 묵묵히 파도를 밀었다가, 당기기만 했다. 시간이 오래 흐른 지금도, 잠뜰의 기억 속에는 아름다운 바다의 추억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치고 힘든 상황이 덮쳐올 때 잠뜰은 그 때의 그 기억을 꺼내보곤 했다. 아직도 선명한 기억속에서 바다는 잠뜰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때마다 그녀도.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