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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향기
w. 티스 (@tis_moon)
찬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날이었다. 10월에서 11월이 다가오는 문턱,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미쳐 옷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추위에 떨며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잠뜰은 코트에 손을 찔러넣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언제나 같았다.
“경위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 일찍 오셨네요?”
투명한 유리문을 열자 눈이 마주친 순경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당직이었는지 눈그늘이 볼 밑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평온한 것을 보아하니 밤새 신고나 사건은 없었던 것 같았다. 잠뜰은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들 좋은 아침이에요.”
잠뜰은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긴 복도를 걸어갔다. 저벅저벅, 그의 걸음 소리가 복도에 낮게 울렸다. 언뜻 떠오를 때가 있다. 수사반 결성 초반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던, 새내기였던 멤버들의 모습은 아직도 작은 해프닝으로 잠뜰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어휴... 그때 진짜 난리도 아니었지.”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지, 라고 생각할만큼 기괴한 만남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으니, 잠뜰은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곤 했다. 그는 손을 뻗어 익숙한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 아니라 다 안왔어?”
잠뜰은 황당함에 빈 웃음을 흘렸다. 아니나 다를까, 사무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제 당직이었던 수 경사 마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잠뜰은 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는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음 내가 조금 빨리 온 건가. 그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사무실을 훑으며 조명을 켰다. 눈 앞이 반짝 하며 시야를 가리더니 익숙한 사무실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뜰은 자기 자리에 앉고는 오늘 해야할 일과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넘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뜰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오전 9시 30분. 그러나 그 누구도 사무실에 출근을 하지 않았다. 이거, 안되겠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감자기 든 의문에 불안감이 그녀를 갉아먹었다. 경찰은 시민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하지만, 경찰의 안전은 스스로가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잠뜰도 이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삐삐라도 쳐봐야하나?”
잠뜰은 손에 들린 삐삐를 만지작 거렸다. 미수반 멤버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책임감이었다. 한 팀의 팀장으로서, 팀원을 챙겨야 한다는 책임감. 그래, 단지 그 뿐이었다. 어찌보면 과도한 보호일 수도 있었다. 물론, 각 경사님과 수 경사는 그리 걱정이 되지 않았다. 어떠한 사정이 있어서 늦는 것이겠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막내인 덕 경장이 걱정되었다. 아무리 젊은 나이에 경장이 되었다지만 아직 어리고, 경력도 그리 많지 않은 새내기로밖에 안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 사실을 알면 덕 경장이 화내겠는걸.
‘똑똑똑-’
희미한 노크 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그 소리에 잠뜰이 고개를 든 순간, 탁- 사무실이 암흑에 물들었다. 조금 새어 들어오던 복도의 불빛도 없어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잠뜰은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총에 손을 대며 낮은 자세로 일어났다. 뭐지, 강도인가? 경찰서에 강도가 있다고? 잠뜰의 눈이 점점 푸른 빛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총을 양손에 든 채 문으로 향한 그 순간, 거짓말처럼 불이 다시 켜졌다. 그리고는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 눈 앞에 나타났다.
“경위님, Happy Halloween!”
팡- 조그마한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각별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뱀파이어 망토를 두른 채 서 있었고, 공룡은 꽃을 든 채 괴상한 날개를 달고 있었다. 수현은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호박 모양 바구니에 사탕을 탐은 채 미소를 짓고 있었고, 라더는 좀비 분장에 실패했는지 입가 옆에 찢어진 분장을 하고는 검은 케이프를 두른 채 검은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덕개는 이상한 밀짚모자를 쓰고는 프랑켄슈타인 변장을 한 채 환하게 웃으며 잠뜰을 바라보았다.
“경위님 것도 준비했어요! 어서 이거 쓰세요.”
“이게 뭐야?”
“마녀 모자에요. 경위님이랑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공 경장님이 그러셨어요.”
잠뜰은 덕개가 내미는 모자를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할로원? 오늘이? 그는 고개를 돌려 달력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은 10월 31일. 망령들이 내려온다는 날이었다. 잠뜰은 모자를 쓴 채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 사탕 드실분?”
“이럴 때 뭐라고 하는거 같던데, 뭐였더라?”
“trick or treat!”
즐거운 웃음 소리가 사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잠뜰은 수현이 건네는 사탕을 입 속에 집어넣었다. 평소에는 단 음식을 잘 먹지 않지만,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자극적이지 않은 단 맛이 혀를 자극하며 목을 타고 넘어갔다. 수현은 그런 잠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각별과 공룡은 장난치던 손을 내려놓고 잠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건 덕개와 라더도 마찬가지였다. 급격하게 바뀐 분위기에 잠뜰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다들 날 봐?”
“.....너무 오랜만이다, 그치.”
어리둥절한 잠뜰의 귓가에는 부드러운 덕개의 음성이 들렸다. 뭔가, 평소에 알던 덕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어른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뜰을 피식 웃으며 흔들리는 눈동자를 애써 가라앉혔다. 고개를 돌려보니 공룡의 눈가는 어느샌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진짜 오래 기다렸어.”
기다리다니, 무엇을? 잠뜰은 혀로 사탕을 녹이며 공룡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움, 반가움,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 하지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잠뜰로서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분명 그랬다. 분명 그랬는데-
“...이 기억은 뭐야?”
잠뜰의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기억들이 흘러 들어왔다. 새 집에 이사온 날, 알 수 없는 이웃들, 어렸을 때 만났던 이와의 재회, 그리고 이웃들의 정체와 그 비밀, 다가온 죽음. 툭- 잠뜰의 눈에서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면, 자네들이...
“뭐야, 너무 잘 살고 있던거 아니야?”
“우리 잠뜰이, 잘 컸구나. 형사도 하고.”
“...다행이다, 잘 살고 있어서.”
“요즘에 악몽 꾸고 그러진 않지?”
각별은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었고, 그 옆에 서있는 덕개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소매로 훔치고 있었다. 라더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수현은 걱정이 되는지 안절부절한 모습이었다. 잠뜰은 눈물이 맺힌 채 피식 웃었다.
“다들 건강하게 지내나보네. 그런데 어떻게 온거야? 그리고 그 세계의 난 이미 죽었을텐데?”
“잠뜰이 네가 먹은 사탕. 다양한 꽃을 배합해서 만든 특별한 사탕이거든. 지금 네 몸은 형사이겠지만 거기에 우리가 아는 잠뜰의 기억이 들어온거지. 그리고 우리도 곧 떠나야 하고.”
공룡이 가지고 있던 꽃을 잠뜰에게 내밀었다. 기억 너머에 흐릿하게 남아있는 꽃의 모양과 일치했다. 흔히 주변이나 꽃집에서 볼 수 있는 꽃은 아니었다. 잠뜰은 그가 내미는 꽃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떠난다니, 그건 무슨 말이야...?”
“이 방법은 1년에 한번, 망령들이 인간계에 갈 수 있는 문이 열리는 날에만 쓸 수 있어. 원래 다른 사계에 사는 우리는 불가능하지만, 언데드의 기차를 타고 넘어왔지.”
공룡이 뒤에 서 있는 라더를 향해 손짓했다. 라더는 뒤에서 아무말 없이 잠뜰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잠뜰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배려심이 넘친다는 것을. 라더 뿐만이 아니었다. 이 곳에 있는 이웃들은 잠뜰에게,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 잠뜰’에게 많은 추억과 기억을 선물해준 이들이었다. 잠뜰은 본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간 잠뜰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 느낄 수 있었다. 잠뜰의 입 안에서 조금씩 녹던 사탕은 어느새 신비로운 맛을 내며 사라져가고 있었다. 분명 잠뜰은 미스터리 수사반의 경위였지만 이들의 이웃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단순히 기억만이 아니라 감정까지 공유하는 것 같았다.
“그 사탕이 다 녹으면, 우리도 사라질거야. 하지만 기억은 시간이 지나야 사라지는 걸로 알고 있어.”
각별이 손에 들린 붉은 액체를 목으로 넘기고는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다들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잠뜰은 손에 들린 꽃을 만지작 거렸다. 수현이 미소를 지으며 잠뜰에게 다가오더니 손에 책 한 권을 쥐어주었다. 책 표지에는 ‘수상한 이웃집’이라는 금색 글씨가 씌여 있었다.
“이거, 우리들의 추억이 담긴 책이야.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지만 원천은 잠뜰이니까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잠뜰은 수현이 내미는 책을 받아들었다. 그 책은 기억과는 조금 달랐지만 익숙한 느낌이 드는건 변함이 없었다. 한편 입 안의 사탕은 점점 녹아 그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최대한 천천히 녹이고 싶었으나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왠지 모를 편안함과 안락한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뭐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공룡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탕의 맛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고 다섯 명의 인영의 미소는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아니 잠깐...!”
“만나서 반가웠어.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잘가요, 우리 수상한 이웃들.”
잠뜰은 눈물이 맺힌 채 손을 흔들었다. 톡- 뜨거운 눈물이 호선을 그리며 뺨을 타고 흘렀다. 잠뜰이 눈을 깜빡 감았다가 뜬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수반 멤버들은 웃으며 서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흐린 시야 너머로 팀원들이 웃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잠뜰의 눈물을 봤는지 수현이 조심스럽게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경위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저희가 늦으려고 늦은 게 아니라-”
수현은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의 주황빛 눈동자에 잠뜰의 미소가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잠뜰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오늘은 그래도 되는 날인 거 같으니 너무 걱정 말고.”
“경위님! 사탕 드실래요? 아니면 초콜릿?”
덕개가 손에 사탕과 초콜렛을 한아름 들고 오며 물었다. 라더와 공룡은 벌써 입에 사탕 한 개씩 물고 있었고, 각별은 달아서 싫다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잠뜰은 덕개의 머리카락을 헝클이고는 사탕을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어, 경위님이 사탕을 드세요? 안드실 줄 알았는데.”
“가끔은 단 게 먹고 싶을 때도 있지.”
“설탕 덩어리가 뭉쳐있는 것을 좋아하다니, 의외네?”
“좋아하는게 아니라 그냥 먹는겁니다만?”
라더가 의외라는 얼굴로 바라보자 공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각별은 입에 물은 종이컵을 손가락으로 툭툭치며 말을 던졌고, 잠뜰은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되받아쳤다. 잠뜰의 입 속에 있는 사탕은 일반적인 단 맛의 사탕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느낌이 또 달랐다. 다른 세계의 이웃들이 아닌, 미스터리 수사반의 팀원들과 함께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오늘은 할로윈이니까 조기퇴근하고 회식 어떻습니까!”
“쟤는 먹을 생각만 한다니까.”
“조기퇴근은 몰라도 회식은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그럼 경위님이 쏘는 걸로? 팀원들의 눈동자가 한 데로 모였다. 잠뜰은 팔짱을 끼며 손으로 탁자 위에 쌓여있는 서류를 향해 턱짓했다.
“자네들은 일이 이렇게 쌓여 있는데 놀고 싶은가 보지?”
피식-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생각에 잠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평소라면 왜 지각했냐고 따졌겠지만, 오늘은 조금 여유를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잠뜰은 손에 남아있는,
신비한 색깔의 사탕 포장지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평생 잊지 못할 향기 포장지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설명: 할로윈, 망령의 문이 열리는 날.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언데드의 열차를 탄 다섯 이종족은 현재 잠뜰이 살고있는 인간계로 이동합니다. 하지만 다른 세계에 가면 말 그대로 ‘망령’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던 수이웃 공룡은 자신의 꽃으로 사탕을 만들면 망령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과 더불어 한 사람의 기억을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할로윈 깜짝 파티는 원래 미수반 팀원 다섯명이 준비를 한 것이었으며, 미수반 수현이 건네려고 했던 사탕을 바꿔치기 함과 동시에 다섯 명에게 각각 ‘빙의’를 합니다. 몸은 아직 언데드의 기차에 남아있기 때문이었죠. 때문에 잠뜰은 그 사탕을 먹게 되어 빙의한 이웃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고, 또다른 잠뜰이었던 그녀의 기억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유효 기간은 사탕이 녹을 때 한정이었던 것입니다.
날조가 많이 들어간 글이니, 그저 재밌게 즐겨주세요:)
Happy Hallow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