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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왔는데 겨울은 가지도 않고
w. 초승달 (@moon_rarge)
그 위대한 봄이라 할지라도 예상하지 못 했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소멸 시켰던 존재를 다시 보게 될 일이 생길 줄은! 봄과는 정반대 편에 서있는 어느 가을에 갑작스럽게 울리는 노크 소리를 무시하는 게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고작해야 신계 안인데 여름이나 가을이 볼 일이 있었다거나 새로 온 겨울이 곧 겨울이 시작되니 조언따위를 구하러 왔을 거라 여겼던 안일한 마음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문 너머로 느껴지는 기운이 이상하게도 불편하면서 그리웠기에 저도 모르게 문을 열어버린 잘 못일지도 모른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음에도 어찌하여 눈과 같이 새하얀 머리카락만은 시야 가득히 흩날렸는지.
"당신은 누굽니까."
봄은 어느새 나타난 단검을 움켜 쥐고서 맞은편에 서있는 이에게 겨누었다. 온 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감히. 누가. 세상을 멸망 시키고자 했던 신을 사칭하지? 눈빛은 점차 차게 가라앉았음에도 주위에 꽃들은 생기를 띄었으므로 존재만으로 몸을 움츠러 들게 만들었다. 겨울이 만연하던 시기 나약했던 봄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찬란한 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전대 겨울의 모습을 하고서 봄의 눈 앞에 서있는 생명체는 고개를 어렴풋이 숙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한숨을 푹 쉬고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봄의 눈치를 살폈다. 결국에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는지 깊게 숨을 들이 쉬고 겨울과도 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담담히 내뱉었다.
"...저 맞습니다. 봄이시여.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오늘 하루 돌아 오게 되었습니다. 별달리 제가 겨울이라는걸 증명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 이대로 다시 소멸 시키셔도 됩니다."
겨울은 봄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약간은 아래로 눈을 내린 채였으므로 시선이 애매하게 어긋나 있었다. 그러니까 겨울은 차라리 이대로 다시 소멸 되고 싶었다. 하루 되돌아온다 한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갈 곳은 이미 오래 전에 잃어 버렸고 그나마 자신을 반겨줄 이도 이제는 저에게 단검을 겨누고 경계했으니. 차라리 이대로 다시 사라지는 편이 모두에게 좋았다. 그런 겨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봄은
"그렇다면 왜 이곳으로 왔습니까. 제가 겨울을 소멸 시켰다는 사실은 벌써 잊으신 겁니까."
"그건."
겨울은 답을 하지 못 한채 입을 다물었다. 봄은 한 발자국 움직였다. 단검의 날 끝은 닿을듯 말듯 아슬아슬했다.
"대답하세요. 하지 않는다면 소멸 시키겠습니다."
"...."
뭘 망설이는 걸까. 여기서 입만 다물고 있으면 겨울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다시 소멸 당하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 올 터였다. 하지만 겨울은 알고 있었다. 봄은 전대 겨울을 사칭하는 의심스러운 존재를 그저 소멸 시키는걸로 해결 할 심성이 아니었다. 정체가 누군지 밝혀내고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냈을게 분명했다. 그러니 봄은 이미 눈치채고 있는 것이었다. 눈 앞에 서있는 이가 겨울이라는 것을. 세상을 멸망시키고나 했다가 자신의 손에 소멸당한 과거의 겨울이었다는 것을.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로 왔습니다."
"...들어오시죠."
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은 닫지 않았다. 겨울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봄을 따차 들어갔다. 덜컥. 겨울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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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게 들은 기억은 있었다. 가을 중 하루는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는 날이 있다고.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인가 보다. 그렇다한들 어떻게 하면 소멸 당한 신이 살아돌아올까 싶었지만 봄은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인과가 어떻게 됐든 식탁 앞 의자에 앉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저 남자는 겨울이 맞았다. 당장에라도 내쫓고 싶을 만큼 불쾌하면서도 따뜻한 차와 다과를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만큼 정감이 들었다. 달그락. 겨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과거에 몇 번이고 와봤던 봄의 집이었으니 더 살펴 봉 것도 남아있지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편안하게 집구경이나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당연했다. 당연했기에 겨울은 더욱 숨을 죽이고 의자에 못 박혀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드세요. 히비스커스 차입니다."
봄은 겨울의 앞으로 찻잔을 놔주었다. 겨울은 한참을 건내진 차를 응시하기만 하였고 봄도 그런 겨울을 눈 깜빡이며 바라보기만 하였다. 먼저 백기를 든 겨울이 차를 한 입 마시자 그제서야 봄은 말을 이었다.
"방은 이층으로 올라가서 왼쪽에 있는 방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특별히 필요한게 있다면 말씀하세요."
겨울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가로 저었다. 그보다 이 층의 왼쪽 방이라 하면 종종 상의 할 일이 있을 때 함께 쓰던 방이었다. 겨울은 수많은 방 중 굳이 그 방을 꼽은게 고의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걸로도 이 집에 있는 게 벅차다는걸 느꼈다. 지금이라도 그냥 땅바닥에서 알아서 살겠다고 말해야 되는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 사이 봄은 남은 말을 끝냈다.
"그리고 제가 바라는 건 한 가지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지금처럼요. 이게 제 마지막 배려입니다."
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 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겨울은 찻잔만을 쳐다봤다. 뒤늦게 고개를 들었을 때 봄은 없었다. 역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채 다시 소멸당하는 편이 봄에게도 겨울에게도 좋았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