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이트
그렇게 그것은 이별이었다
w. 환타 (@Nyangsosugye)
서라더는, 죽었다.
에투알의 마지막 왕이자, 박잠뜰의 친구였던.
이미 다 무너져버린 왕국을 붙들고는 마지막을 맞이한. 그녀의 친구.
정말이지 멍청하게도 제 운명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마주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포기하지 못한 저의 친구.
그런 그는 죽었다.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몰랐던 운명을 기어코 끌어안고서.
잠뜰은 그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 하나 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 했다는 말이 맞다. 잠뜰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당연히 라더가 건넨 편지도 읽을 줄 몰랐다. 몇 날 며칠을 새워가며 읽어보아도 몇 단어 제외하고는 도저히 눈에 들지 않았다. 잠뜰은 글을 읽을 줄 몰랐으므로, 약간의 아쉬움과 함께 편지를 접어두었다. 그러면 안 됐었다. 조금이라도 글을 배워서, 며칠만 더, 시간을, 노력을-. 끝 없는 후회, 원망, 그리고 또 다시 후회.
그 어느 누가 자신의 친구가 나라의 왕자라고, 그것도 반쯤 썩어버린 나라의 왕자라고.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건 잠뜰 또한 매한가지였다.
자신이 쏘아야 하는 이 또한, 저의 친구였다는 것을.
그는 그리 잔인하고 냉랭한 사람이 아니었다. 잠뜰이 그를 쏘지 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라더는 죽었다. 그가 관여를 하였든, 무시를 했든. 어차피 라더는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그를 잊지 못 했다. 건네지 못 한 마지막 인사 때문일까.
며칠 뒤 10월 31일은, 할로윈은 알다시피 죽은 이들이 돌아오는 날이랬다. 그런 한낱 외국의 문화에 잠뜰은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보기로 했다. 정말 어쩌면 다시 라더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푸르던 어린 날의 친구를.
외국 문화-할로윈-와 관련된 서적을 찾아보며 잠뜰은 한 가지 알아낸 게 있었다. 제 친구가 10월 31일에 온다면 그것은 친구가 아닌 필시 다른 것이다, 라는 것. 죽은 이들은 11월 2일에 돌아오는 거랬는데. 잠뜰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마지막 인사 한번.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아서. 그래도 할로윈에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라더야?"
잠뜰은 짧은 탄식을 뱉었다. 기어코 할로윈에 찾아오는구나. 왜 왔냐고 쏘아붙이려던 차에 지어 보인 말간 웃음이 옛날을 떠올리게 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의 뒤에 비친 부드러운 달빛이 꼭, 그때 보았던 꽃밭을 회상하게 했다. 이제는 낡아버린 추억이지만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날의 햇살과 바람과 꽃의 향기, 감정. 전부 잊히지 않고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풍경을 한껏 감상할 수 있을 만큼이나 생생하다. 할로윈이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너는 왜 지금 왔을까. 조금만, 이틀만 더 기다렸어도 되었을 텐데 그리도 오랜 친구가 보고 싶었나. 마지막조차도 배웅해주지 못한 친구가 보고 싶었나.
그리움이란 당연한 거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 비록 아군이 아니었다, 그 감정은 어찌 주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솟구쳐 올라오는 게 그리움이다. 누구나 그렇듯 잠뜰 또한 그러했다.
"오랜만이네"
들려오는 목소리가 반가웠다. 저게 정말 진짜 라더일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반가움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말없이 라더를 꽃밭으로 이끌었다.
달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하얀 튤립이 보였다. 분명 잠뜰이 꺾었던 꽃의 종류이리라. 그는 꽃을 한 송이 꺾어 라더에게 건넸다. 한 송이 뿐 아니라, 꽃다발을 만들기라도 하려는 듯이 꽃을 잔뜩 꺾어서 한데 묶어 건넸다. 흰 튤립들 사이사이엔 또한 구름 같은 하얀 안개꽃이 섞여 있었다. 꽃을 건네받은 그는 고맙다며 웃었다.
많이 달라졌네, 잠뜰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너는 아마 꽃을 꺾으면 안 된다 하면서도 받아주었을 것이다. 분명.
꽃다발을 안고 환히 웃는 모습은 그 옛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정말이지 다를 바 없었다. 정말로. 잠뜰은 뒤를 돌아 그대로 내달렸다. 울 것 같았다. 한참을 뛰다 멈추었다. 또 도망치고 있었다. 제자리에 우뚝 선 그는 대강 시간을 가늠했다. 지금쯤이면 11시-. 정도. 할로윈이 끝나가고 있었다.
할로윈이 끝난다는 것은 곧 라더와의 헤어짐을 의미했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던 잠뜰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너무나도 질려서 그 얼굴빛은 가히 달빛과 비교할 수 없었다.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던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다만 다른 방향으로. 이별이 무섭더라도 네가 진짜가 아니더라도 혹여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도. 이대로 다시 도망치기는 싫어.
다시 다다른 곳에는 라더가 그대로 서 있었다. 어딜 갔다 온 거냐며, 내내 기다렸다고. 환하게 말하는 그를 보았다. 그는 머금고 있던 미소를 풀어내듯 내려놓고 말을 꺼냈다.
나 진짜 맞아. 진짜 라더.
진짜로?
응
너 사라지고 있는데, 그것도 알아?
당연히
다음에 또 올 거지?
..응
거짓말쟁이
맞아, 잘 지내. 보고 있을게
잠뜰은 남겨진 꽃 무더기를 집어 들었다. 천천히 마을로 걸어갔다. 달빛이 밝았다. 눈부시게 밝았다. 너는 아침에 와야 했다. 시리도록 찬란하게 빛나던 사람이었다. 달이나 별 따위엔 어울리지 않았다. 너는 밤이 아니라, 낮에 왔어야 했다. 햇살과 빛나던 노을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여리지만 강인한,
그런 사람이었다.
만약 네가 이 나라에서, 마을에서 잊히게 되더라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함께 했던 모든 순간 하나하나를 전부.
되려 몇 번이고 곱씹으며 망각 속에 유일한 기억이 되어 주겠다.
노을은 언젠가 지기 마련이다. 너도 그랬을 것이다.